수박농사 지어 장학금 마련하는 강규창 할아버지(글/이미홍_객원기자)

온혜리의 수박 장학금 할아버지
강규창 할아버지(72)는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토박이 농사꾼이다. 박통 때 한 동네에 한 대씩 나눠주는 리어카를 동리서 제일 처음 끌었고, 경운기도 남보다 앞서 몰았다. 온혜리 4H 새마을 운동으로 마을길도 넓히고 슬레이트 지붕도 이었으며 농촌지도소 산하 자원지도자도 지냈고 예비군 소대장과 이장도 여러 차례 지내고 지금은 노인회장을 맡고 있다. 한마디로 온혜서 나고 자라 온혜를 지키고 있는 터줏대감이다. 자식들 출가시키고 부인 조금남 할머니(68)와 수박농사를 지어서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7년째 장학금을 주고 있다.


정부지원금을 받아 농사를 크게 짓는 젊은 영농후계자도 아니고, 토지가 많아 몇 만평씩 농사를 짓는 부농도 아니다. 그저 사천 평 남짓 되는 농지에 부부가 열심히 농사를 지어 그 해 수익이 나는 대로 형편껏 장학금을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비록 만석지기 부농은 아니지만 마음만은 그 누구보다 부자인 강규창 할아버지는 가을에 그 해 수확을 다 하고 나면, 우선 농사지으며 들어간 농자금이며 이런저런 부채를 정리하고는 두 부부 먹고 살 만큼만 남기고 나머지는 장학금을 주기 위한 통장에 적립을 한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적립된 돈으로 2004년부터 매년 안동고등학교와 안동여고 졸업생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차 떼고 포 떼고 다 떼면 뭐가 남겠느냐는 말처럼 삼, 사천평 농사에 농자금이며 두 내외 생활비를 제외하면 1년 농사에 남는 게 많지 않다. 그런데도 할아버지는 매년 선뜻 두 내외가 먹을거리를 남기고 나머지를 모아 장학금을 주려고 노력한다. 액수가 많지는 않지만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에 가지 못하는 학생들이 많고 그 학생들에게는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한 학기 학자금 정도의 장학금이라도 목마른 기다림일 수 있다는 것을 할아버지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처럼 거액을 희사하거나 평생 모은 몇 십억을 쾌척하지는 못하지만 자신이 줄 장학금이 어떤 학생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할아버지는 어떻게든 장학금 액수를 채울 생각에 골몰하게 된다고 한다. 


 




부농이 되고 싶었던 농사꾼
30여 년 전에 할아버지가 손수 지어 이사했다는 도산온천 입구의 일자형의 슬래브 집 마당에는 할아버지가 모으고 있는 폐지와 빈병, 알루미늄 캔들이 한 마당 가득이었다. 캔은 부피를 줄이기 위해 차가 지나다니는 길가에 일부러 부려 놓기도 하는데 할아버지가 좋은 일을 하기 위해 고물을 모은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기꺼운 마음으로 그 캔 위로 바퀴를 지나가게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차바퀴가 상할까 염려되어 슬쩍 옆으로 비켜서 지나가기도 한다고 했다. 조금남 할머니는 내가 아무리 뜻이 좋아도 이웃에게 폐를 끼쳐서야 되겠느냐며 한 쪽 길옆으로 빈 캔들을 치워주고 차가 지나가고 나면 할아버지는 또 캔을 슬쩍 길가에 부려 두곤 하는 모양새다.


윗대 어른들이 대대로 자리를 잡고 농사를 짓고 살던 곳은 원래 지금은 물에 잠기고 없는 도산면 월곡이었다. 그런데 식구는 많고 농사는 적어 먹고 살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거기에다 큰 장마까지 져서 형편이 더 어려워졌다고 한다. 먹고 살 궁리를 하다가 큰 장마가 들어 물난리를 겪었던 갑술년에 강규창 할아버지의 부친 되시는 이가 동생 되시는 분과 함께 형제분이 같이 이곳 온혜로 옮겨 앉았는데, 그때 장가도 들지 않은 총각의 몸으로 온혜로 온 형제 분이 각자 여기서 장가를 들고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게 윗대 형제분이 온혜에 터를 잡고 담배농사를 시작한 게 오늘 날 강규창 할아버지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는 이야기시다. 강규창 할아버지는 그러니까 부친 되시는 분이 장가를 들고 얻은 첫 아들로 이곳 온혜에서 태어난 토박이시다. 군대에 3년 갔다 온 기간을 빼면 한 번도 온혜를 벗어나 사신 적이 없으시다. 그때는 다들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이라 한 동리에 학생이 한 두 명뿐이던 시절로 가정 형편 때문에 학교 공부를 더 못한 것이 한이 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고향 땅을 벗어나 도시로 가고 싶다는 생각은 못했다고 한다. 그건 아마도 할아버지가 집안의 장남인 게 가장 큰 이유로 당연히 부모님 모시고 농사일을 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있었다고 하신다. 당시에 농촌에서 한 해 농사를 지어서 자기 먹을 거 먹고 다음해 보릿고개까지 빚 안지면 부자라고 했다. 그만큼 다들 가난했다. 쌀 한 말을 꾸면 한 달 뒤에 한 말하고 닷 되를 갚아야 하는 장리 벼에 배보다 배꼽이 큰 고리 빚에, 가난한 농사꾼들의 꿈은 배곯지 않고 빚 안지고 사는 것이었다. 강 할아버지도 이왕지사 농사를 지을 바에는 그런 부농이 되고 싶었다고 했다.


 




온혜 총각, 녹전 처녀한테 장가 들었소
강규창 할아버지는 제대를 하고 나서 얼마 안 되어 조금남 할머니에게 장가를 들었다. 장남이다 보니 부친이 서두신 것도 있었고 일가를 이룰 때가 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얼굴도 안 보고 결혼이 성사되었지만 당시로서는 할아버지도 기골이 장대한 선남이었고 아직도 속눈썹이 고운 조금남 할머니도 사진 속에 어여쁜 신부의 모습이 고대로 남아있다.
“친정이 녹전이었는데, 어른들끼리 선을 보시고 우리는 그때는 얼굴도 안 보고 시집을 왔지. 그때 내 나이가 스물이었지. 스물에 시집 와서 48년을 여기서 살았네. 그때부터 이날까지 오남매 낳고 주야장창 농사 일 하면서 그래 살았지 뭐 별 게 있나?”
하시는 할머니 말씀 끝에 신부되는 이의 첫인상이 고왔느냐는 물음에 ‘신부야 다 곱지 뭐, 안 이쁜 신부가 있나?’ 하신다. 하여튼 곱기는 고왔다는 말씀이시다.
그리고 할아버지 스스로도 내심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지어 부농이 될 욕심도 내심 있었다고 하신다.
“그때는 젊기도 했지만 농사도 공부를 해서 제대로만 지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고, 실제로 영농교육을 받고 의욕적으로 농사를 지었지. 그때 과수원을 사서 사과농사를 지어 재미를 보기도 했고. 그런데 농사라는 게 잘 되다가도 한 번씩 하늘이 안 도와줘서 흉년이 들거나 아니면 가격 파동이 나니 농민들만 죽어나지, 선대부터 대토호이거나 타고난 부농이 아니고는 농민이 농사로 부자 되기가 그래서 그렇게 어려운 거지. 그때 내 생각만큼 큰 부자는 못 되었지만 그래도 게으름 부리지 않고 열심히 살았지 뭐. 많지는 않아도 내 손으로 일군 땅도 있고 좋지는 않아도 우리 식구 몸 누일 내 집도 있고. 이제는 남한테 손 안 벌리고 적은 돈이나마 남을 도울 수도 있고.”


남들은 안 알아줘도 내 딴에는 열심히 살았다는 할아버지 말에 옆에 앉은 할머니가 옛날 생각이 나신 듯 맞장구를 치신다. 그러면서 두 분이 그 옛날 가난하던 시절 생각이 나시는 듯 주거니 받거니 서로 이야기를 풀어 놓으시려는 데 친구와 바람 쐴 겸 나물 얻으러 왔다는 큰 딸이 갈 길이 바쁜 듯 할머니를 찾는다.
“대구에 사는 데 요즘은 교통이 좋아서 얼마 안 걸리니까 주말이면 가끔 친구들하고 나들이 삼아 저렇게 와서 나물 뜯고 호박 다서 된장찌개 끓이고 해서 고기도 구워 먹고 쌈도 사 먹고 놀다 가기도 하고 더러 일도 거들어 주기도 하고 그래요. 자주 왔다 갔다 하니까 우리야 딸네 얼굴도 보고 더러 우리 아쉬울 때 이런저런 심부름도 해 주고, 좋지요.”
어른들이 말씀하시는 맏딸은 살림밑천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소리가 아니지 싶다. 뒷밭에 가서 호박도 따고 호박잎이며 깻잎이며 푸성귀를 뜯어 왔다며 친정 엄마인 조금남 할머니를 붙잡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더니 친구가 가보고 싶어 한다며 탈춤축제장에 들렀다 대구까지 가려면 늦겠다며 길을 나선다. 그런 딸을 불러 세우더니, 아마도 아파트에 싸는 이웃에게 깨를 팔아 주기로 한 듯 가격을 묻는 걸 할아버지가 너무 많이 받지 말라고 하신다. 딸은 아버지 엄마 농사지으신 공을 생각한 듯,
“나는 그것도 적다고 지금 조금 더 달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요.” 한다. 그래도 농사 지은만큼, 받을 만큼만 받아야 하는 거라고, 내가 말한 만큼만 받으라고 거듭 당부하시는 할아버지다. 농사짓는 우리네 아버지, 할아버지의 마음들은 다들 저렇게 한 가지인데, 우리네 식탁에 장난을 치는 사람들은 아마 모르긴 몰라도 진짜 농부들은 아니지 싶다. 그네들은 옳은 농부가 아니라 돈만 아는 장사치들일 것이다.


 




독거노인들 바라지 위해 모으는 폐품
조금남 할머니가 4년 전에 운전면허를 따셨다고 한다. 멀리는 못가지만 가까운 근동에는 타고 볼일 보러 다니는데, 한 번씩 접촉사고 내서 귀퉁이에 박아 놓으면 아들이 와서 고쳐주고 간다고 한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버스 타고 다니시는 게 편하다 신다. 사실 막내아들이 여 와서 지내 보이 두 노인네가 답답하다 싶었는지 엄마 운전면허 따면 차 사 주겠다고 해서 땄는데, 필기하고 실기를 한 번에 다 붙었다고 자랑을 하신다.


아닌 게 아니라 아직도 눈에 총기가 가득하시고 애교도 많으실 것 같은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맡은 노인회장 일도 뒤에서 바라지를 잘하시는 모양이다. 폐품을 팔아서 혼자 사시는 마을 노인 분들 김장 담가 드리는 일에서부터, 명절 되면 양말 한 짝이라도 선물하는 일이며, 겨우 내내 노인정에서 마을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모여서 밥 해 먹고 노시는 일까지 손가는 일이 한 둘이 아닐 터인데 말없이 안에서 부녀회원들을 잘 다독여 같이 그 일들을  해 나가신다. 겨울이면 두 분을 만나려면 마을 노인 회관으로 오면 된다신다. 겨우 내내 마을 노인들이 같이 모여 놀고 쌀이며 김치며 각출을 해서 같이 밥도 해 먹으며 겨울을 나다시피 하는 데, 이것도 강 할아버지가 노인회 일을 맡아보면서 정착이 되다시피 한 일이다. 남에게 베풀기 좋아하는 할아버지와 살다보니 어느새 그런 일에는 군말 없이 따르는 할머니다.


내 자식 먹이고 위하며 살기도 빠듯한 데 할아버지가 처음 장학금을 내놓겠다고 했을 때 할머니는 내심 서운한 점도 없지 않아 있으셨던 모양이다. 그나마 자식들이 다 출가해서 저들대로 잘 살고 있고 다행히 제 식구 건사하고 살 능력이 되어 부모한테 손 벌리지 않고  두 내외분 사시는 데 큰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해서 할아버지가 하시는 대로 뒤에서 지켜보고 계셨던 듯하다. 그러다가 이제는 할아버지 하시는 일을 당연하다 여기시는 듯 이제는 한 해 농사 지어 남는 건 으레 장학금으로 나가야지 하신단다.


먼저 간 큰 아들, 가슴에 생채기로 남은 아픔
그런데 사실 할아버지가 2004년 경로우대증이 나오는 65세가 되던 해 수박 농사를 지어 처음 장학금을 주기 시작한 데에는 할아버지의 가슴 속에 가난으로 인해 겪었던 서러움과 교통사고로 죽은 큰 아들을 가슴에 묻어야 했던 사연이 숨어 있었다.


부모한테 물려받은 재산은 없었지만 밤낮없이 부지런하게 농사를 지어 식구들을 굶기지는 않았지만 고만고만한 살림에 농촌에서 오남매를 교육시키는 일은 만만한 게 아니었다. 학비를 낼 때가 되면 자연 빚을 질 수 밖에 없었고, 그런 형편에서 공부를 잘 해 대학에 가고 싶어 하는 큰딸을 학비가 없어 뒷바라지를 못해 준 일은 두고두고 할아버지의 가슴에 생채기가 됐다. 그 첫째가 안동여고를 나왔다. 할아버지가 장학금을 주기로 하고 제일 처음 찾은 학교가 안동여고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가슴에 영원히 묻은 믿음직했던 큰아들이 안동고등학교를 나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찰이 되면 어떻겠노? 하는 아버지 한 마디에 경찰공무원 시험을 봐서 한 번에 떡하니 붙어 부모의 자랑이 되었던 장남이 95년 스물여섯의 나이로 교통사고로 먼저 갔을 때 조금남 할머니는 정신을 놓아버리다시피 하셨다고 했다.
“한 한 두 달은 저 사람이 멍하니 제 정신이 아니었지. 애들이 와서 엄마 붙들고 남은 우리는 자식 아니냐고, 정신을 놓으려는 저 사람을 붙들었지. 부모 마음이 다 그렇지. 시간이 지나니까 그냥저냥 또 살아지더라고.”
그 시간을 어찌 말로 다 할까? 그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할아버지의 말씀 뒤로 젖어드는 눈시울을 감추시며 그예 부엌으로 자리를 피하시는 할머니의 뒷모습에 아직도 눈물이 매달려 있는 것만 같다.
“사람들이 내가 농사지은 얼마 안 되는 돈을 장학금이라고 내놓은 것을 보고 뭐라 할이지 모르지만 나는 그냥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뿐이야. 나야 더 배우고 싶어도 그 시절에는 다들 그랬으니까 엄두를 못 냈지만, 우리 첫째 딸 대학에 못 보내준 게 그렇게 마음에 한이 되더라고. 그때가 한창 어려울 때였는데, 빚이 많다고 농협에서 나한테는 대출을 더 못 해 준다고 하더라고. 그때 친척들한테 억지로라도 무리해서 부탁하면 돈을 빌릴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다가 제때 못 갚으면 서로 의만 상하겠더라고. 고리로 이자를 물며 빚을 내서 또 빚을 갚고 하며 살던 형편이라 결국에는 대학을 포기하라 그랬지.”


오남매가 줄줄이 학교를 다녀 등록금이 둘씩 셋씩 겹칠 때면 돈 구하러 다니느라 발바닥이 부르틀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웃에서 그 집은 돈 나올 구멍은 뻔한데 무슨 수로 학비를 다 감당해 내느냐고 허를 내둘렀다고, 그럴 때면 남의 돈으로 시키니더 하고 웃곤 했다는 할아버지, 그 남의 돈이란 사실 따지고 보면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땀과 눈물이었더랬다.
 
형편껏 내느라 얼마 안돼, 그 얘기 그만하소
액수도 얼마 안 되고 장학금 준다고 어디 가서 얘기하기도 그렇다고 장학금 이야기는 그만하자는 강 할아버지, 나는 없는 사람들한테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에, 우리 딸 같은 아이들 중에도 가고 싶어도 대학을 가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을 텐데 하는 생각에 시작한 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시작하고 보니 아들이 다녔던 학교도 마음에 걸리더라고 했다. 그래서 안동여고와 안동고등학교 학생을 정해 소정의 학비를 장학금으로 지원하게 된 것일 뿐 소문낼 일은 아니라 했다. 그러나 기실 들어보니 장학 사업은 할아버지의 오랜 소망이었다.


“생각은 벌써부터 했지. 그런데 농사를 지어서는 도무지 이놈의 큰돈이 모이지를 않는 거야. 장남이다 보니 부모님 모시고 살면서 우리 형제들 시집 장가 다 보내고 오남매 교육시키고 먹고 살고 하다 보니까 아무리 부지런을 떨어도 그게 쉽지가 않더라고. 어느 정도 뭉칫돈이 생기면 시작하려고 했는데, 돈 쓸 데는 많은 데 돈은 안 모이고 이러다가는 평생 가도 좋은 일 한 번 못해보고 죽게 생겼더라고. 그래서 생각을 바꿨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이라도 시작을 하자고. 내가 가진 작은 돈이나마 한 사람이라도 그걸로 인해서 대학을 가고 기회를 얻어서 배워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그걸 또 나처럼 적은 힘이나마 남하고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좋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 부끄럽지만 용기를 내서 학교로 찾아갔지. 다행히 학교에서 내 뜻을 고맙게 받아주셔서 시작하게 된 거고.”


할아버지가 2004년부터 지금까지 전달한 장학금은 모두 2650만원, 13명의 학생들이 강 할아버지의 장학금을 받고 대학생이 되었다. 첫해에는 500만원을 가지고 250만원씩 두 학교에 나누어 주었다. 수확이 좋은 해는 학생들에게 혜택이 더 돌아갔고 수박농사가 시원찮았던 해는 할 수 없이 액수를 줄일 수밖에 없는 강 할아버지 장학금은  뙤약볕 아래서 땀을 흘린 대가로 거둔 정직한 장학금이다. 자식을 생각하는 시골아버지의 순박한 바람이 담긴 따뜻한 마음이다. 매년 연말이면 장학금을 줬던 학생들을 만나 식사를 같이하는 자리도 갖는다. 타지로 간 학생들도 있고 다들 바쁜지라 쉽지는 않지만 연락이 되는 학생들은 만나서 어떻게 지내는 지, 어려운 형편에 대학생활을 무사히 잘 이어가고 있는지 이야기도 듣고 격려도 하고. 그런데 작년에는 비가 많이 와서 수박농사가 잘 안되었다. 수확이 절반도 안 되게 줄어버렸다. 농사가 안되면 강 할아버지 머리에 제일 처음 드는 생각이 올해 장학금은 어쩌지? 제대로 다 마련할 수 있을까? 올해도 액수를 조금 줄여야 하나? 하는 생각이라고 한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이제는 목돈이 아니더라도 작은 돈이라도 수입이 생기면 일단 장학금을 주려고 만들어준 통장에 넣어둔다.


“혹시라도 장학금을 주지 못하는 사태가 오면 안 되니까. 이왕 시작한 일이니 내 힘닿는 데까지는 해야지. 내가 농사를 더 이상 짓지 못하게 되면 하는 수 없지만 그전까지는 계속하고 싶은 게 내 바램이야. 작년에는 그래 자식들이 주는 용돈까지 모아서 200만원씩 맞추어 주었지 머. 내가 조금 덜 쓰고 조금 더 모아서 한 사람이라도 장학금을 더 줄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니까. 돈 많이 벌면 남 돕는다는 거, 내 다 쓰고 남으면 남 돕는다는 건 말짱 다 헛말이라. 돈이 많지 않아도 마음이 있으면 얼마든지 도울 수 있는 길이 있다꼬.”




다리 수술 후라 더욱 벅찬 농사일
지금보다 10년만 더 젊었더라면 농사도 더 많이 지을 수 있었을 텐데, 하시며 몇 년 전부터 다리가 아파 거동이 불편해 마음만큼 일을 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운 강 할아버지다. 할아버지는 퇴행성관절염으로 고생하시다 작년에 무릎수술을 하셨다. 덕분에 할머니의 일이 더 많아진 셈이니 할머니에게 많이 미안하다고 하신다. 그래도 할머니를 은근히 건너다보시며 장학금 주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는 마음을 강하게 내비치시는 강 할아버지를 할머니는 말리시지 않는다. 누구보다 할아버지 마음을 잘 알고 계시는 할머니시다.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지만 이심전심, 아마도 할머니 마음에도 할아버지 가슴에 쌓인 것과 똑 닮은 덩어리 하나가 들어앉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말없이 할아버지 하시는 일을 묵묵히 거들고 있는 것이지도 모른다. 강 할아버지와 조 할머니는 아들딸들의 아부지 엄마였기에.
우리 어른들이 나부터 조금만 나 자신만 보지 말고 내 주위를 한 번씩만 돌아볼 줄 안다면 우리나라가 다 같이 잘 살 텐데, 너무 자기 자신만 알고 내 자신, 내 가족만 챙기며 사는 게 안타깝기만 하다는 강 할아버지시다.


평생을 농부로 사시면서 언제 농사짓기가 제일 힘들었냐는 물음에, 평생을 힘들게 농사지었다며 웃으신다. 우리 정부가 하는 농업정책은 한 마디로 농민을 망하게 하는 농정이라는 강 할아버지, 농민들에게 어떤 품종을 지으라고 권장을 하고 정책을 제시를 했으면 끝까지 그걸 끌고 나가야 하는데, 권장만 해 놓고 뒤에 대책이 없어. 출하량 조절도 안 되고. 책임도 안지고. 그러다가 농민만 죽어나가고 흐지부지 되고 또 다른 품목 권장하고 대책 없이 정부는 나 몰라라 하고.
“내가 처음에는 담배농사를 지었어. 군대 가기 전이었는데 예안에 있는 담배 수납창고까지 일일이 지게로 지고 담배를 수납하러 갔어. 수납 다 하고 돈 찾으러 갔더니 빚쟁이가 먼저 와서 받아가고 한 푼도 안 남았어. 그렇게도 살았어. 그러다가 나중에 담배농사 말아 먹고. 그러다가 제대해서 정부에서 과수, 사과 농사를 대대적으로 권장을 해서 64년부터 나도 사과 농사를 짓기 시작해서 한 20년을 지었어. 근데 전국적으로 너도나도 사과 농사를 짓는 바람에 밑지면서도 겨우겨우 유지하다가 나중에는 결국 사과나무를 다 뽑아냈어. 그때 한창 고추농사를 권장해서 나도 고추농사를 크게 했는데 그것도 너도나도 지으니까 고추 파동 나고.”


할머니 말처럼 일만 실컷 하고 돈은 안 되는 농사를 전국의 농민들이 지은 것이었다. 고추 한 근에 500원, 600원 해도 농민들은 하소연할 데가 없었다. 고추를 1톤 트럭 한 차에 가득 실어 보내고 받은 돈이 50만원, 그래도 정부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고, 대책도 당연히 농민이 알아서 해야 했다. 그래서 고추 농사를 줄이고 수박을 심기 시작한 것이 팔 년 전부터라고 한다. 수박은 트럭에 실어 출하를 해야 하기 때문에 농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야 하는데 강 할아버지네 밭은 고개 너머 언더배기에 있어 농로가 정비되지 않아서 수박농사를 지어도 출하가 늦어져 제 값을 받지 못하게 생겼다. 그래서 강 할아버지는 부지런히 면사무소며 시청에 찾아다니며 고충을 털어놓으며 도움을 요청했다. 농사지어 먹고 살려는 농민들을 위해 농로 정비 좀 해달라고 민원도 넣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렇게 해서 농로가 정비되고 처음 몇 해는 수박농사로 재미를 보기도 했다. 그러나 수박농사도 부침이 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떤 해는 비가 많이 와서, 어떤 해는 한꺼번에 너무 많이 출하되어서 대박이 나기도 하고 쪽박을 차기도 했다. 할아버지삼천 평 수박농사 지어서 한 해 사천만원  수익을 올린 해도 있었던 반면에 작년에는 이것저것 다 제하고 남은 게 달랑 400만원이었는데, 그걸로 장학금을 주었다고 했다. 이놈의 나라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아직도 때때로 농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시장을 앞에 두고 도박을 해야 하는 것을 의미했다.
 
소박한 농사, 소박한 장학금 오래 이어졌으면
올해 수박농사로 얻은 수익은 1200만원, 고추 농사도 날씨가 도와주지 않아서 재미를 못 봤다. 인건비니 농자재 값이니 이것저것 제하고 나면 올해도 빠듯하기만 하다. 두 노인네 몸도 한 해가 다르게 축이 나서 병원에도 들락거려야 할 형편이고. 작년에 수익이 좋지 않아서 액수를 조금 줄인 탓에 올해는 좀 만회를 해 보려고 했더니 마음처럼 쉽지가 않다. 그래도 아직 학생들 졸업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아 있지만 농촌에서 돈 나올 구멍이야 가을 추수 끝나면 빤하니,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 천상 폐품 하나라도 더 모아야 할 판이다.


어떻게든 끊이지 않고 장학금을 한 푼이라도 더 주고 싶어서 머리를 짜내느라 골몰을 하는 강규창 할아버지의 자못 심각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과 그런 할아버지를 건너다보며 그냥 가지고 있는 만큼만 하시면 될 걸 괜한 고생을 사서 하신다고 걱정 반 투정 반이신 조금남 할머니의 푸념 속에 집 앞을 나서니 누렇게 익은 논둑길 위로 가을 해가 앉아 쉬고 있다. 농부의 소박하고도 넉넉한 그 마음을 닮은 듯, 온혜를 돌아 나오는 길, 가을 햇살이 따사롭게 차 꽁무니를 따라 붙는다. <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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