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향과 안동(글/김용직_서울대 명예교수)

1.스물 네 살의 보통학교 교사
널리 알려진 대로 나도향은 1920년대 중반기에 우리 문단에 등장, 활약한 소설가다. 그는 1902년 서울 남문 밖 청파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경손(慶孫)으로 한의사인 조부 밑에서 자랐으며 교회 계통에서 세운 공옥소학교(攻玉小學校)를 졸업하고 김소월보다 한 발 앞서 배재고보를 다녔다. 그의 동기로는 박영희(朴英熙)가 있었다. 한때 조부의 뜻대로 경성의전에 입학했으나 곧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두었다. 그 직후 동경에 건너가 와세다 대학을 지망했지만 학비 조달의 길이 막혀 귀국한 바 있다. 그가 김동인을 만난 것은 이 무렵이다. 이후 그는 3차 문예동인지 『백조』에 동인으로 참가했다. 그 창간호에 문청(文靑) 냄새 가득한 소설 「젊은이의 시절」을 발표했으며 <시골>, <회화(會話)>등 투루게네프의 산문시를 번역한 것으로 나타난다.


『백조』에 발표한 나도향의 작품은 대체로 감상적인 어조에 후기 낭만파 문학의 특색을 이룬 비관적 색조에 지배된 것이었다. 그러나 1925년 「뽕」(『개벽』1, 2월호), 「물레방아」(『개벽』8월호)에 이르러 이런 그의 작품세계는 일변했다. 이때부터 그의 단편들에는 등장인물의 성격이 뚜렷이 부각되고 사건들에 현실적인 감각이 살아 움직이게 된 것이다. 오늘 그는 『백조』동인 가운데 김동인(金東仁), 현진건(玄鎭健)과 함께 초창기의 한국 근대 단편을 본격화시킨 작가로 평가되며 1920년대의 한국 소설을 본격 근대문학으로 격상시킨 대표적 문학자로 손꼽힌다. 한창 문단의 유망주로 손꼽힌 그가 빈궁과 무절제한 생활의 결과로 타계한 것이 1926년이다. 그의 죽음은 요절과 조서(早逝)가 정석처럼 되풀이된 당시의 우리 문단 사정으로 보아도 이례적이라고 할 정도였다.




2.나도향의 근무학교
그 생애가 짧았음으로 나도향의 이력서 사항에는 유별나게 미심쩍은 구석이 나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는 단선적인 삶을 살다간 작가로 학력이나 경력사항에서 특별히 분석, 검토를 필요로 하는 항목이 내포될 여지가 적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꼭 하나 예외로 생각되는 부분이 남아 있다. 그것이 1차 동경유학에서 돌아온 다음 그가 시골에 내려가 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점이다. 이제까지 우리 주변에서 나온 나도향론에서는 이것을 1920년대 초에 안동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것으로 해석해 왔다. 그 논거를 이루어 온 것이 『백조』2호의 권말에 붙은 육호잡기(六號雜記) 일부다.


羅稻香氏는 慶北安東 땅에서 敎鞭을 잡고 계시게 되었습니다. 號曰笑亭之翁이지만은 多恨多情한 氏가 더구나 그 變的性格에 엇지나 애를 썩히고 지내는지 日常 잘 부르는 哀傷의 泗泚水曲만 저녁 노을 비최인 洛東江 흘으는 물에 아마나 하염없이 앳굿이 흘니여 보내겠지요. 日前에 부친 便紙에 「여기 꽃이 다 저바렸나이다. (......) 寂寂寥寥한 이곳에 외로히 있는 저는 다만 學校 뒤에 聳出한 映南山 우에 올라서서 西北便 하늘을 바라볼 뿐이외다.


여기 나타난 바와 같이 안동에서 이루어진 나도향의 교편 생활에는 그 학교의 이름이나 직급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 무렵까지 안동에는 중등학교가 생기기 전이었다. 당시 안동시내에 소재한 공립학교로는 지금 안동중앙초등학교가 된 안동보통학교가 있었을 뿐이다. 여러 문학적 담론에서 그가 안동보통학교 교사 근무로 기술된 사실은 여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단정은 몇가지 점에서 사실 해석을 위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검증 절차를 건너 뛴 것으로 재검토가 필요한 경우다.


일제는 한일합방과 함께 우리 민족에게 전면적인 황민화 교육(皇民化 敎育)을 실시했다. 조선총독부 학무국은 그들의 교육목표를 기능적으로 달성하기 위하여 각급 학교의 교사들 자격부터를 엄격하게 규정, 제한했다. 특히 초등학교에 해당되는 보통학교에서는 원칙적으로 사범학교 출신을 우선적으로 발령, 배치했다. 경우에 따라서 사범학교 출신만으로는 교사 요원 숫자가 모자랄 수 있었다. 그럴 경우에는 중등교육을 받은 자들을 뽑아 촉탁교사로 배치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런 때에도 엄격하게 교사의 자질을 문제 삼았다. 그 요건중 하나로 교사 지망자가 교육목표를 충실하게 이행할 것인가 아닌가 여부를 검토, 심의한 것이다. 그들이 짠 교과과정에 따라 수업을 실시하는 일도 자격심사 요건중의 하나였다. 나도향은 이미 드러난 바와 같이 이례적으로 예술가적 기질을 강하게 타고난 작가였다. 그런 그가 총독부 학무국의 지휘, 감독을 충실하게 이행할 것을 최우선 전제로 하는 공립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을까에 의문의 여지가 생긴다.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해서는 좀 더 적극적인 반대 논증자료도 얻어 볼 수 있다. 필자는 혹 있을 수 있는 예외 임명의 가능성을 생각해서 안동보통학교의 후신인 안동초등학교에 의뢰하여 1920년도 이후 5년간 교사들의 교사 명단을 문의해 보았다. 그 가운데 나경손(羅慶孫)이나 도향(稻香)의 이름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3.개화기와 안동의 근대교육 환경
안동보통학교 교직원 명부에 이름이 올라있지 않다고 하여 나도향이 20년대 초두 안동에서 가진 교육자 체험이 그대로 허공에 떠버리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런 판단을 내리기에는 앞서 제시된 『백조』2호의 육호잡기가 너무 뚜렷하다. 그렇다면 나도향이 그 시기에 안동소재의 다른 학교에서 교편을 잡지는 않았을까. 이런 의문을 가진 필자에게 입수된 것이 1999년도에 나온 『안동의 독립운동사』 한 권이다. 이 책의 저자인 김희곤(金喜坤) 교수는 안동대학교 사학과의 교수로 한국근대사 중에서 특히 독립운동사가 전공이다.
그는 필요로 하는 정보, 자료를 얻기 위해 관계 문헌은 물론, 정보를 가진 사람을 일일이 찾아내어 구술을 녹취하기까지 했다. 그의 책에는 안동지방의 민족운동이 의병투쟁과 같은 적극 실력 활동의 양태와 함께 교육, 계몽을 통해서도 이루어진 점이 밝혀져 있다. 개화 계몽기에 안동지방의 교육활동은 이상룡(李相龍), 유인식(柳寅植), 김동삼(金東三)등이 주도했다. 그들은 보수유림들의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향교재산등을 처분하여 신식교육기관인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했다. 1910년 한일합방과 함께 이상룡, 유인식, 김동삼등 협동학교 설립의 주역 3인은 망국의 한을 안고 서간도로 건너가 버렸다. 거기서 그들은 독립군 기지를 만들고 군정부를 설립, 운영했다(뒤에 서로군정서로 개칭됨). 그것으로 국내 진공과 함께 일제를 한반도에서 구축할 기반구축에 전념한 것이다. 그들의 망명과 함께 협동학교는 교세가 꺾이어 그 후 폐교되었다.
그러나 민족의식에 뿌리를 내린 안동지역의 교육운동은 그것으로 종막이 되지는 않았다. 3·1운동을 전후해서 안동지방에는 보광학교, 계명학림, 원흥의숙, 선성의숙등 사립교육기관이 10여개가 넘게 창설, 운영이 되었다. 그 가운데 이상룡의 혈족인 고성 이씨(固城 李氏)가 세운 문중학교인 사립 동흥강습소가 있었다. 이 학교는 안동부의 진산인 영남산 동쪽기슭에 자리했고 그 교사가 고성 이씨의 종택 임청각(臨淸閣), 아흔 아홉칸 한식와옥이었다. 이 동흥학교 교사 명단에 권태희(權泰熙)와 함께 나도향(羅稻向)의 이름이 올라있다.
여기 나오는 도향(稻向)이 도향(稻香)임은 몇가지 증거자료로 입증이 가능하다.


① 지금 나도향의 본가에는 1922년 안동에서 교편을 잡을 때의 것이라고 하여 의자에 앉아 찍은 그의 사진이 전한다(김용성, 도향 나경손,『한국문학사 탐방』, 1973, 134면, 참조). 이 사진에 곁들인 설명은 앞에 제시된 『백조』2호의 「육호잡기」와 일치한다. 다만 이것만으로는 그가 교편을 잡은 것이 안동보통학교인지 그 밖의 어떤 학교인지 명백하게 판명되지 않는다.


② 나도향과 동흥강습소의 상관관계를 밝히기 위해서 이 학교가 임청각을 교사로 상용한 사실이 주목되어야 한다. 협동학교의 설립자 가운데 한사람인 이상룡(李相龍)을 말할 때 잠깐 언급된 바가 있는 임청각은 고성 이씨(固城 李氏) 사랑채에 딸린 수기찰물(修己察物)의 공간이었다. 그러니까 거기서 교편을 잡은 도향(稻向)은 도향(稻香)의 와전일 가능성이 크다. 이에 대해서는 좀 더 뚜렷한 증거자료가 추가된다. 석주 이상룡(石洲 李相龍)이 만주로 망명한 다음 동흥학교의 교장은 역시 고성 이씨(固城 李氏) 문중의 장로인 이승걸(李承傑)이 맡았다. 지금 안동에는 그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어려서 부형(父兄)들이 나도향과 아침저녁으로 만나고 학교에서 가르치는 모습도 보았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4.임청각, 동흥학교 교사 나도향
나도향이 임청각에 머문 사실은 1930년대 후반기에 등장 활약한 시인 이병각(李秉珏)의 「광려귀래기(匡麗歸來記) - 잃어버린 고향을 찾아서」에도 나온다. 시인 이병각(李秉珏)은 1910년 경상북도 영양, 석보에서 태어났다. 안동에서 보통학교를 다닌 다음 중동중학을 다니다가 광주학생사건 때 동맹휴학에 연루되어 중도 퇴학이 되었다. 한때 동경에 건너가 중앙대학에 적을 두었으며 1935년 조선중앙일보에 꽁트 「눈물의 열차」가 당선되어 문단에 진출했다. 등단 초기에 그는 「봄의 레포」, 「고무산(古茂山)간 옥이(玉伊)」, 「아드와의 원수를」 등 경향색이 짙은 시를 썼다. 그러나 1930년대 말경 순수시 전문지『시학(詩學)』에 참여한 다음부터 작품 경향이 순수 서정의 세계 추구로 바뀌었다. 시 이외에도 그에게는 「조선현실의 논고」, 「농민문학의 본질」, 「시에 있어서의 형식과 내용」등 평론과 함께 「나의 독언초(毒言抄)」,「외투기」, 「부엉이」, 「홍료초(紅蓼抄)」등 수필들이 있다.
1941년 서른 한살을 일기로 타계한 이병각(李秉珏) 시인이 남긴 작품은 시와 소설, 수필, 평론등 통틀어서 160여 편이다. 이들 가운데서 「광려귀래기」는 시인이 서울에서 오랫만에 고향을 찾으면서 갖게된 감회를 기행문투로 적은 수상이다. 이 글이 쓰여진 것은 1937년 가을이었고 그 무렵까지 서울에서 안동에 이르는 중앙선은 개통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글의 앞 부분은 시인이 김천을 거쳐 경북선으로 바꾸어 타고 안동에 이른 노정이 적혀있다. 다음은 그에 이은 부분이다.


열 한 시 - 여기는 慶北線의 終點 安東이요. 내가 서울서 車에 올라 실로 열 두 시간만에 내리였소. 점심때가 다 되었는데 아직 나는 얼굴도 씻지 못하고 차안에서 자다가 일어난 채로 그냥 거리를 걷고 있소. 물론 아침도 먹지 않었소. 그러나 조금도 시장한 氣는 없고 그저 머리가 휭 나리쪼이는 가을 볕살에 눈이 시오. 
나는 여기서 自動車로 百餘里 險路에 시달일 것을 생각하니 코에는 까소링의 야릇한 냄새가 숨어드는 것 같소.
내가 어렸을 때 이곳 普通學校에 다닌 일이 있음으로 퍽이나 낯익은 곳이요. 뿐만 아니라 읍에서 멀지안은 동쪽 바로 洛東江邊에 있는 탑골이란 마을은 나와 퍽 因緣이 깊은 곳이기도 하오. 이 마을에는 新羅때의 큰 塔이 있소. 이 집 근처에는 무궁화나무가 둘러싸고 있는데, 내가 어릴 때 妹兄을 따라서 놀던 곳이요. 이 집 무궁화씨는 누님이 나에게 보내주어서 우리 집 祠堂마당에 심어 두었소. 벌써 그것이 十五年前일인가보오. 이 塔골 마을에 東興講習所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때 敎舍로 쓰이던 집은 하루 밤 사이에 독갑이들이 지었다는 九十九間의 큰집이였소. 이 학교엔 故羅稻香이 선생으로 와서 있었소. 그리하여 이 학교에서 배우던 나의 妹兄은 稻香과 더불어 洛東江邊을 걸으며 춘원의 泗泚水 노래를 부르던 것을 내가 보았소.


여기 나오는 낙동강변의 탑골, 무궁화나무, 독갑이가 지었다는 구십구간(九十九間)의 큰집, 춘원의 사자수 노래를 나도향과 함께 부른 매부 등에 대해서는 모두 얼마간의 보충설명이 필요하다. 나도향이 교편을 잡은 동흥강습소가 교사를 임청각으로 한 사실은 이미 드러난 바와 같다. 임청각이 위치한 자리는 옛 안동부 동쪽 법흥사(法興寺)와 법림사지(法林寺趾) 가까이였다. 이 가운데 법흥사(法興寺)는 신라시대 중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절이다. 몇 차례의 전란을 거치는 가운데 절집은 완전히 없어지고 지금 남아있는 것은 국보 제16호로 지정된 7층의 전탑뿐이다. 이 일대는 안동의 진산인 영남산의 동쪽 기슭 한골짜기를 차지하고 있다. 탑골의 동리 명칭은 거기에서 연유된 것이다.


다음 사당 주변에 무궁화 나무가 나오는 점도 지나쳐 버릴 수 없는 일이다. 임청각의 주인인 석주(石洲)가 개화 초기부터 철두철미하게 애국애족의 화신으로 산 점은 이미 드러난 바와 같다. 그에게 대한제국이 국화로 지정한 무궁화를 심고 가꾸는 것은 곧 애국 애족의 길이었고 민족의 기상을 살리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가 망명한 후에도 임청각 주변에는 무궁화가 보호, 재배된 것이다.


임청각의 원류인 고성 이씨(固城 李氏)는 본래 고려 문종 때의 명신인 철성군 이황(鐵城君 李潢)에서 시작된다. 그의 후손 가운데 한분인 이증(李增)은 조선왕조 세종 원년 한양에서 태어났다. 단종 때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중앙정국의 어지러운 모습을 보고는 산수에 숨어 살기로 결심했다. 그가 영남쪽으로 낙향하여 자리를 잡은 것이 당시 안동부의 남문 밖이었다. 그의 아들 가운데 하나인 이명(李洺)은 성종 17년 사마시에 합격한 다음 벼슬길에 올랐으나 연산군때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영덕에 유배된 적이 있다. 풀려난 다음 정치에 싫증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중종 8년 안동에 돌아와 영남산 기슭에 집을 지은 것이 임청각이었다.


안동은 일찍부터 영가(永嘉)라는 별호를 가진 고장이다. 이때 영(永)자는 파字로 이수지합(二水之合), 곧 두 갈래의 물이 합치는 곳을 뜻했다. 여기서 두 갈래의 물은 낙동강의 본강과 그 지류인 반변천(半邊川)을 가리킨다. 그 합수지점에 바로 임청각이 들어섰다. 임청각은 배후에 화산(花山)의 별칭을 가진 영남산을 두고 그 동쪽 편에는 무협대(巫峽台)가 있었다. 또한 남쪽 강 건너에 문필봉(文筆峰)과 낙타산이 솟아올라 자연풍광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이명(李洺)은 여기에 그의 집을 얽으면서 그 규모를 99칸으로 하였다. 봉건왕조에서 임금이 아닌 신분의 사람이 100칸 이상의 집을 짓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이렇게 보면 임청각의 주인은 사가(私家)로서 최대 규모의 저택을 지은 것이다. 아흔아홉칸 큰 집의 독갑이 하룻밤 공사설은 여기서 이루어진 건축설화인 셈이다.


나도향과 강가를 거니면서 춘원의 사자수 노래를 부른 이병각(李秉珏) 시인의 매부는 임청각의 작은 집 출신이었다. 석주(石洲)에게는 조카벌이 되는 사람으로 이름이 이세형(李世衡)이었다. 1905년생으로 그가 학령기가 되었을 때 협동학교는 이미 기능이 마비되어 있었다. 그는 당시의 관례에 따라 집안 어른에게 한문을 배운 다음 10대에 이르러 동흥학교에 입교했다. 나도향과는 세 살차이였지만 학교에서는 엄연히 스승과 제자사이였다. 그러나 일단 학과 시간이 끝나면 두 사람은 사제간의 울타리를 허물고 친구처럼 노닐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병각(李秉珏) 시인의 기억 속에 두 사람이 노래를 부르며 강가를 거닌 장면이 나오는 것은 그런데에 연유한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로 밝혀두면 이병각(李秉珏) 시인의 매부인 이세형(李世衡)은 후에 대구에 나가 운수업에 관계하고 또한 자금 원조를 해주는 이가 있어 동해안에 있는 영덕의 금광에도 손을 대었다. 이런 사실을 이병각(李秉珏) 시인은 앞에 보인 인용부분 다음 자리에 <(......) 도향(稻香)은 지하(地下)로 간 지 오래며 매형(妹兄)은 지금 동해안(東海岸)에서 금광(金鑛)을 하고 있소.>라고 적었다. 이런 기록들이 가리키는 바는 명백하다. 전후 문맥으로 미루어 이병각시인의 동흥학교와 나도향 관계 기록은 모두 사실에 부합된다. 이것으로 우리는 1920년 대 전반기에 나도향이 안동에서 교편을 잡은 학교가 정확히 동흥학교임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금 안동에서 동흥강습소에 관계되는 정보 중 문헌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은 한조각도 없다. 그러므로 당시 나도향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그와는 전혀 연고가 없는 안동까지 내려가 교편을 잡게 되었는가를 알 길은 아주 막혀 있다. 그가 가리킨 과목이 무엇이었는지 안동 체재 때 어떤 사람들과 사귀게 되었는지도 알려진 것은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그가 유고로 남긴 중편 「청춘」의 허두에 얼마간 안동체험의 자취가 드러난다.


안동(安東)이다. 태백(太白)의 영산(靈山)이 고개를 흔들고 꼬리를 쳐 굽실굽실 기어 내리다가 머리를 쳐들은 영남산(映南山)이 푸른 하늘 바깥에 떨어진 듯하고, 동으로는 일월산(日月山 )이 이리 기고 저리 뒤쳐 무협산(巫峽山)에 공중을 바라보는 곳에 허공중천이 끊긴 듯한데, 남에는 동대의 줄기 갈라산(葛羅山)이 펴다 남은 병풍을 드리운 듯하다.


이렇게 시작하는 이 소설에는 지명이나 고적, 산, 강의 이름만도 주왕산(周王山), 남강(南江), 영호루(映湖樓), 태화산(太華山), 서악(西岳), 옥동(玉洞), 한절(法龍寺), 연자원(燕子院), 낙양촌(洛陽村), 반구정(伴鷗亭), 귀래정(歸來亭)등이 차례로 나온다. 이 가운데 영호루, 태화산이나 법룡사, 반구정, 귀래정은 상당기간 안동에 체재한 경험이 없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곳들이다.
나도향이 안동에 대해서 상당한 매력을 느낀 자취는 「화염에 싸인 원한」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청춘」과 아주 혹사하게 이 작품도 그 허두에 영남산, 영호루 등이 나온다. 그러나 이 작품 역시 「청춘」과 비슷하게 등장인물의 성격화나 사건의 처리가 성공작으로 평가되기에는 난점을 가진다.


이미 드러난 바와 같이 나도향의 작품으로 성공작의 이름에 값하는 것은 「벙어리 삼룡이」, 「물레방아」, 「뽕」등 단편들이다. 이들 작품은 예외 없이 그 등장인물이 우리 사회의 하층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며 그들이 엮어가는 사건들 역시 다분히 관능적이며 충동적이다. 나도향이 체재한 1920년대 전반기까지 안동지방을 지배한 것은 유학적 질서체제에 따른 도덕률이었고 삼강오륜을 뼈대로 한 행동양태였다. 나도향의 작품으로 이에 귀납될 수 있는 인생관이나 세계 인식의 자취가 맥을 이루고 드러나는 것은 거의 없다. 여기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결론도 단순하게 된다. 나도향이 본격적으로 우리 문단에 진출하기 전 한때를 안동에서 교편생활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 구체적 사실로 포착되는 것이 동흥학교 근무다. 동흥학교 곧 사립동흥강습소는 고성 이씨(固城 李氏) 문중에서 설립, 운영한 학원이었으므로 나도향이 교편을 잡았을 때도 유학적 정신풍토가 감지 되었을 것이다. 거기에는 당시까지 안동지방을 지배한 민족의식의 입김도 서려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나도향에게 그런 정신풍토와 문화환경은 그의 인격형성이나 행동양태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안동은 나도향에게 스물네 해의 짧은 생애를 살면서 거쳐 간 차창 너머의 풍경정도로 그쳐버린 셈이다. <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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