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부동(和而不同)(글/박인수_본지 운영위원, 경희한의원 원장)

국민수준에 못 따라오는 정치수준
정치권에서 통용되는 말 중에 ‘한 나라 정치의 수준은 그 나라 유권자의 수준과 비례한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이 말이 우리나라의 경우에 맞지가 않은 것이 국민수준은 높은데 정치수준은 바닥을 기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국민의식수준이 높다는 것은 전쟁의 폐허에서도 높은 교육열로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내었고, 끈질긴 민주화투쟁으로 군부독재를 종식시켰으며, IMF라는 경제위기도 서로 합심하여 단시일에 극복한 걸 보면 잘 알 수가 있다. 세계적인 경기불황에서도 꾸준히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있으며 경제원조국에서 수혜국의 지위로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무역규모 1조 달러로 2010년 말 기준 세계 9위의 경제대국이기도 하다. 국민수준이 높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준 예가 IMF위기상황에서 자발적으로 벌인 ‘금 모으기 운동’이다. 과거 비슷한 상황에 처한 국가들의 사례와 비교해보면 우리국민들이 정말 대단하구나 하는 자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정치 수준은 바닥을 기고 있는데 가끔씩 국회의사당내에서 벌어지는 활극이 해외토픽의 단골메뉴로 올라와 놀라게 하기도 한다. 그러니 대한민국에서 중요한 정치적 사건들이 터질 때마다 언론들은 앞 다투어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이 시대변화와 국민의 요구에 제대로 따라가지 못한다.”는 비판을 쏟아 내는 것이다. 정치가 시정잡배들이 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좀 잘 났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는데도 왜 후진성을 면치 못하는 것일까?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정치철학의 부재, 대한민국 정치가 낙후된 이유
대한민국의 정치가 낙후된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정치철학의 부재다. 정치적 소신을 가지고 정의감에 불타며 원칙주의자인 사람이 정치에 입문하는 것이 근원적으로 어렵게 되어있다. 정치권에서 그런 사람을 발견하기란 마치 모래사장에 떨어진 바늘 찾기와 같은데 선거운동이라는 것이 시장바닥부터 훑어야 하고 경로당이나 작은 모임까지 일일이 다 찾아다니며 고개를 내밀고 인사를 해야 하는데 그런 일을 대쪽같은 선비들이 하기가 쉽지 않아서다. 덕망이 있는 인사가 출마하면 ‘털어서 먼지 안나오는 사람 없다.’는 식으로 뒤를 캐고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온갖 유언비어와 흑색선전으로 ‘카더라 통신’으로 떠들고 ‘아니면 말고’로 어물쩍 넘어가버린다. 그러니 선거판이라는 곳이 도저히 군자가 끼어들 곳이 아니다. 게다가 다른 후보들 은 저마다 거창한 민생공약을 들고 나와 자기 능력 밖의 일들도 하겠다고 나팔 부는데 이건 되고 저건 안 되고 하는 진솔함으로 일관하는 사람이 당선될 확률은 지극히 낮다. 혈연, 지연, 학연 같은 연줄에 의지하지 않고 금권선거의 유혹을 물리치며 ‘정책과 인물’을 내세워 당선되기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다. 그래서 지역구 정치인들 중에 군자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참 재미있는 것은 선거에 임박하는 해가 되면 너도나도 책을 내고 출판기념회를 연다는 사실이다. 지난 4년간의 치적을 알리고 정치후원금을 모으기 위해서이겠지만 출판된 책 내용을 들여다보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군자가 아니면서 군자인척을 하는 것 정도는 애교로 봐줄만 한데 남의 치적을 자신의 것으로 가져 온 것도 있고 책이라기보다는 국회자료집을 모아서 출간한 것들도 있다. 정말 후안무치다. 능력이 안 되면 하지나 말아야지 제 욕심만 앞세워 하겠다고 나서는 이런 사람들이 정치를 하고 있으니 우리나라 정치가 후진성을 면치 못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개인의 정치적 철학과 양심 용납되어야
정치철학을 가진 사람이 당선되더라도 국회에서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펼치기란 쉽지 않다. 국회의원이 하나 둘도 아니고 몇 백 명이나 되는데 각자가 소속된 위원회가 있고 국가적인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들은 위원회에서 논의되고 협의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기란 쉽지가 않다. 또한 대부분의 정책들은 당에서 논의되고 당론이라는 것으로 도출되어 나온다. 일단 당론이 정해지면 그 결정에 따라야 하는 게 우리네 정치풍토다. 의원총회에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는 있지만 초선인 경우에는 다선의원들이나 실세들에 밀려 발언권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자신의 의사에 반하는 쪽으로 당론이 결정되더라도 마지못해 따라야 하는 경우가 있다. 소속의원들이 당론을 따르는 것이 정강정책의 실현이라는 당위성에서 볼 때 일견 타당한 면이 있지만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침해하기에 ‘무조건’이라는 단서를 붙이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는 측면도 있다. 그럼에도 당론을 따르지 않는 의원은 ‘해당행위’로 간주되며 당내 윤리위원회에 회부하여 징계를 하려든다. 정당의 목적 달성을 위해 소속의원을 맹목적인 거수기로 만들어 버리는 것도 선진정치를 실종시킨 이유다. 만약에 각 정당들이 당론은 정하되 사안에 대해 의원들이 알아서 소신껏 투표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어떻게 될까? 다른 것은 몰라도 국회의원들의 품격은 좀 더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론이 결정된 대로 무조건 따라가는 것보다는 당론이 우선해야겠지만 가끔은 자신의 정치철학과 양심에 따라 표를 던진다면 여당이 소속의원 숫자만 믿고서 함부로 날치기 하는 일은 보다 어려워질 것이다. 날치기는 표단속이 중요한데 당론에 반기를 드는 의원들이 하나 둘 씩 나오게 되면 당 수뇌부의 누구도 날치기 통과를 자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지금까지 해왔던 야당의 행보도 많이 달라질 것이다. 여당이 중요정책을 다수의 힘만을 믿고 몰아붙이기 하는 상황에서 투표에서 질 것이 뻔한 야당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투표를 거부하고 단상을 점거하여 단독처리를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차선책이다. 매번 그런 식이니 야당은 의회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정당이 되고 정부여당이 하는 일에 죽기 살기로 반대하는 것처럼 비춰지고 만다. 여야불문하고 국회의원들이 국익을 우선하여 정책을 결정하도록 하고 개인의 정치적인 철학과 양심에 따라 판단하게 한다면 ‘날치기’라는 용어는 우리나라에서 사라지지 않을까하고 꿈꾸어본다.  
하지만 그런 꿈을 깨고 현실로 다시 되돌아오면 의원 개인이 당론에 배치되는 투표를 한다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야합의로 정책투표를 할 때 각 정당은 투표에 참여하는 의원숫자를 기준으로 표결결과를 예상하는데 그게 가끔 차이가 나서 재미난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한다. 당의 수뇌부는 당론을 거역한 배신자가 누구인지 색출한다고 야단법석을 치는데 배신자가 된 의원들의 그 다음 행보도 뉴스거리가 된다. 대부분은 실수로 찬반을 잘못 표기했다고 오리발을 내밀지만 자신의 정치적 소신과 양심에 따라 당론에 반하는 투표를 했노라고 하는 의원도 있다. 정말로 군자다운 행동이긴 한데 그런 분들은 다음번에 국회의원 뱃지를 달 확률이 낮아지는 게 문제다. 투표는 국회의원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론에 따라야 할지 거스를지는 자신이 결정하면 된다. 하지만  당론을 거역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랬다가는 그걸 빌미로 나중에 자신에게 불리하게 공천권이 행사될까하는 우려 때문이다. 지역주의가 심한 지역은 깃발만 꽂으면 당선되는 곳인데 당론을 거부한 표결 때문에 당 수뇌부에 밉보이게 되어 공천에서 탈락하기라도 한다면 그걸로 정치생명이 끝나는 것이다. 물론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권토중래를 노려볼 수도 있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그러니 아무리 양심적이고 똑똑하던 사람들도 막상 정치권에 들어가 버리면 당론을 거스를 수가 없고 맹목적으로 따라야하기에 자기 색깔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계파정치와 쇄신파의 아이러니
계파정치라는 변수도 있다. 붕당정치의 폐해가 심해진 조선후기에 숙종이 과감히 탕평책을 도입하였고 영정조시대에 와서도 탕평책이 국가적 과제였던 이유는 내편 네편을 갈라서는 되는 일도 안 되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런 잘못들이 고쳐지지 않고 여전히 지속되어 내려오는 것은 그곳에 소속된 사람들이 어떤 계파에 몸담고 있느냐에 따라 자신의 정치행로의 유불리가 결정이 나기 때문이다. 계파간의 분쟁으로 중요한 일을 앞두고서 같은 편끼리 갈라서고 당론이 사분오열되는 것은 모두가 계파정치의 심각한 폐해 탓이다. 계파정치의 척결은 올바른 정치를 펼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인데도 계파가 사라지지 않는 것은 그것이 바로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기 때문이다. 혼자서 독자적인 행동을 하는 것보다는 여럿이 모인 계파에 소속되어 있어야 당내에서 어느 정도 지위를 누릴 수 있고 그 사람들의 힘을 입어야 더 크게 될 수가 있다. 그래서 당권을 잡고 힘을 가진 측이 주류가 되고 당권을 잡기위해 다음을 준비하는 것이 자연적으로 비주류가 된다. 대부분이 그 안에서 줄을 서지만 어느 계파에도 소속되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이 총선을 앞두고서 울며 겨자 먹기로 선택하는 것이 ‘당 쇄신파’다. 그런데 가끔 보면  쇄신당해야 할 인물이 그 쇄신파 끼어서 당 쇄신을 부르짖고 있는 코미디를 연출하기도 한다. 계파라는 것이 원래 그렇다.  


한국정치의 후진성은 페어플레이의 실종
한국 정치의 후진성은 페어플레이의 실종에 있다. 정당의 목적이 정치적인 견해를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여 정권창출을 통해 자신들의 정강을 실현하는데 있기에 궁극적인 목적이 정권획득에 있다. 그러니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일 수는 있고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심리를 근저에 깔고는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상대방이 하는 일에 태클을 거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내가 잘해서 기회를 잡아야지 상대가 잘못해서 내게 기회가 오도록 하는 것은 저열한 방법인데도 염치없이 그 방법을 쓰고 있다. 정부여당의 실정은 곧 국가경제에 피해가 가고 국민생활에 나쁜 영향을 끼치는데 그런 것은 개의치 않는 것 같다.  정부정책이 잘 못되었을 때는 야당으로서 반대를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그렇게 해서 잘못되는 것을 미리 막고 그러는 과정에서 잘못이 걸러져 바로 잡아지기도 하고 더 좋은 방안을 도출할 수도 있다. 그런데 자기들의 뜻과 다르다고 해서 사사건건 반대를 하게 된다면 그건 문제가 좀 심각해진다. 그것도 정당한 반대보다 반대를 위한 반대를 그리고 국익에 의한 판단에서보다 당리당략적인 판단으로 한다면 나라꼴이 엉망이 된다. 요즘 야당이 정부여당의 정책에 대해 반대하는 수준은 거의 태클 걸기에 가깝다. 너희들도 예전에 그랬으니 이번에 우리가 이러는 것을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거 같은데 이래갖고서야 어디 정치가 제대로 된다고 할 수 있겠는가. 민생을 책임지고 국가경제를 살려야 할 올바른 정책을 수행해야 할 사람들이 그저 당리당략에만 눈이 멀어 정부정책이 잘못되기를 바라고 있으니 통탄할 노릇이다. 정부가 잘못하는 것은 야당이 제대로 역할을 못한 탓도 있으니 같이 책임을 져야하는 건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게 문제다. 야당이 국정수행에는 관심이 없고 정권을 잡는 일에만 관심을 두어 정부여당을 상대로 끝없는 싸움을 벌인다면 그런 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나라가 딱 그렇다. 정부여당이 정책을 결정하면 야당은 온갖 이유를 들어 반대부터 하고 본다. 국회에서 여야간에 협의를 하기는 하지만 야당은 정부정책이 잘 되기를 바라지 않으니 순순히 합의해줄 리가 없다. 여당은 또 어차피 안 될 것 그냥 적당히 협상하는 시늉이나 하고서 시간을 질질 끌다가 결국에는 의사당내에서 날치기 통과를 한다. 야당은 들어주기 어려운 조건을 내세워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다가 날치기로 통과하면 정권을 심판하겠다는 핑계로 국회에서 뛰쳐나가 장외투쟁을 벌인다. 쇼다. 그것도 볼썽사나운 유치한 쇼. 그렇게 된 이유가 다 페어플레이의 실종 때문이다.


소인배를 솎아내고 군자를 뽑는 일이 최우선
논어의 자로편(子路篇)에 ‘군자는 화이부동이나 소인은 동이불화한다(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는 말이 있다. ‘군자는 화합하되 부화뇌동하지 않고 소인은 부화뇌동하며 화합하지 않는다.’는 뜻인데 그 이유는 군자는 도리에 맞으면 서로 화합하지만 도리에 맞지 않으면 따르지 않는데 반해 소인배는 각자의 이익이나 기호가 같을 동안에만 부화뇌동하여 어울릴 뿐이고 이해가 달라질 경우 언제든지 등을 돌리기 때문이다. 화이부동(和而不同)에 덧붙여 위정편(爲政篇)에는 군자는 주이불비하며 소인은 비이부주(君子 周而不比 小人 比而不周)한다고 하였다. 주(周)가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것이며 비(比)는 비슷비슷한 인간들끼리 뭉치는 편당현상이라고 본다면 군자는 보편적인 원칙에 따라 사람을 사귀기에 두루 사귈 수 있지만 소인은 남과 견주기를 좋아하고 이익을 쫒아 패거리를 짓기 때문에 두루 사귈 수 없다는 것이 된다. 즉 패거리를 짓는 것은 군자가 아닌 소인배라는 것이다.
어느 것이 군자의 행동이고 소인배인지는 보다 분명해졌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정치를 제대로 반석에 올려놓기 위해서는 청치판에서 활개치고 있는 군자를 자처하는 소인배들부터 솎아내고 제대로 된 군자를 정계에 진출 시킬 필요가 있다. 그러기위해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화이부동’하는 군자가 있는지 찾아볼 일이다. 그럼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칭송 듣는 사람을 군자로 알면 되는가? 틀렸다. 그는 패거리 짓는 장기를 가진 사람으로 속이 음흉한 사람이다. 그들이 가장 자주 쓰는 말이 “우리가 남이가?”하는 것이다. 주변에 있는 누구든 득표에 도움이 된다면 흑백의 구분 없이 자기편으로 만들어 끌어들인다. 그걸 그들은 포용력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공자는 ‘모두에게 좋은 사람은 선한 사람이 좋다하고 악한 사람이 나쁘다고 하는 사람만 못하다.’고 했다. 패거리를 짓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줏대가 없이 철저히 자기 이익에 따라 행동한다. 우르르 무리지어 몰려다니며 ‘단지 우리 편’이란 이유만으로 잘못 된 것조차도 감싸 안고 눈감아주는 것은 패거리다. 그건 소인배들이 하는 동이불화(同而不和)지 화이부동과는 거리가 멀다. 군자는 보편적인 정당한 원칙에 입각하여 가치관을 세우고 뚜렷한 철학을 가지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에 편견이 없는 사람이다. 의(義)로운 일 앞에서 하나가 되겠다는 주관이 있기에 의롭지 않은 사람들은 내치며 다양한 조직원의 의견을 수렴하지만 그 원칙이 옳고 그름이기 때문에 사익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똥을 보고서 달려드는 날파리들이 없기에 오히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남들로부터 마음으로 늘 존경을 받기에 외롭지 않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것은 당연하지만 ‘우리끼리’하면서 같은 편을 지어버리면 그 순간부터 다른 사람들은 남이 되고 만다. 군자는 화합하고 존중하되 나와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기에 편을 만들지 않지만 소인들은 자기와 같아지기를 바라기에 다른 사람과 화합할 줄 모르고 상대를 존중할 줄도 모른다. 그래서 남을 함부로 평가하고 꼬투리를 잡아 비판하며 싫어한다. 입을 열 때마다 남을 비난하기에 열 올리는 사람이 있다면 절대로 가까이 해선 안 된다. 그런 사람은 소인배로 나의 귀와 눈을 멀게 하는 사람이다. 군자는 타고난 사람이 아니라 노력여하에 따라 될 수 있는 사람이기에 인간답게 살기위해서는 군자가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세상 만물이 온갖 다양성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꾸며주듯이 우리 인간도 저마다 다른 개성을 지니며 백인백색이다. 그러니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상호 존중해 나갈 때 진정한 화합과 조화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늘 화이부동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안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