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달리고 사랑하고, 자유로운 영혼의 화가 김종희(글/사진/피재현_시인, 노암공방 대표)

한 아이가 있었다
금곡동 작업실에서 요즘 그녀는 조문국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한 여자아이가 있었다. 집은 가난했고, 눈은 맑았다. 틈만 나면 연필로 공책에 무엇인가를 그렸다.


동화책에 나오는 예쁜 주인공을 그리기도 하고 들판에 지천으로 피어나는 봄꽃을 그리기도 했다. 더러 자화상을 그리기도 했으리라. 그런데 선생 딸인 그 아이의 친구는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린다. 그것도 스물 네 가지 색으로. 아이는 생각한다.
'나도 나중에 돈 벌면 크레파스를 살거야!'
아이는 중학교에 갔다. 면에서 처음 생긴 중학교에 도회지에서 선생님들이 왔다. 미술선생님은 예쁜 스커트에 하얀 블라우스를, 음악 선생님은 웨이브 머리에 리본을 맨 핑크빛 블라우스를 입었다. 아이는 생각한다.
‘나는 나중에 예쁜 집에서 그림을 그리고 살아야겠다!’
그 아이는 화가가 되었다.
오늘 그 아이의 작업실을 찾아간다. 소원대로 화가가 된 아이, 소원대로 예쁜 집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살게 된 아이.


김종희의 화실을 찾아간다.
금곡동 화실은 안동여고로 오르는 언덕길에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발랄한 여학생들의 재잘거림을 들을 수 있는 곳, 창을 열면 김종희 화백은 예쁜 색을 부러워했던 어린 시절로 쉽게 돌아갈 수 있으리라.
김 화백은 주로 금곡동 화실에서 그림을 그린다. 함께 작업하는 동료들이 있고 늘 곁을 지켜주는 반려견 깜지가 있는 곳. 그는 지금 이 곳에서 조문국(召文國)의 공주로 살아가고 있다. 신라보다 훨씬 이전에 세워졌던 조문국이라는 나라, 지금은 작약꽃이 평원을 이루고 있는 의성 금성산 일대의 전설 속의 나라.
캔버스 한 트럭을 사다놓고 그녀는 지금 조문국의 탄생과 조문국에서 살았던 사람들과 신당수를 그리고 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전생에 조문국의 공주는 아니었을까 생각하고 있다. 조문국의 공주는 잊혀진 왕국을 그리워하며 자신을 만들어준 신목을 베어다가 악기를 만들고 있다. 작약평원을 뒤흔드는 악기가 완성되고 나면 그는 조문국의 왕녀가 되리라.




김종희의 작업실 1. 금곡동 작업실
금곡동 작업실에는 공주님 말고도 여섯 명의 화가들이 함께 작업을 하고 있다. 각각의 이젤을 앞세우고 수다를 떨면서 서로의 그림을 기웃거리며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 나도 그 한 켠에 미술시간처럼 막막한 이젤 하나 세워두고 싶어진다.
프랑스 유학 전에는 솔밤작가촌에서 그림을 그렸다. 유학을 마치고 들어와서는 옥동의 시온빌딩과 안동댐 작업실을 거쳐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제법 넓은 화실 한 켠에 매트리스가 깔린 작은 공간이 따로 있다. 이곳에서 숙식을 다 해결하는 모양이다.


금곡동 작업실은 그녀의 그림처럼 밝다. 바깥과 접해있는 두 면이 창문이고 창밖을 막아서는 건물도 없다. 적당한 언덕길에 선 탓에 제법 동네전망이 시야에 들어오고 아침 햇살은 하루의 에너지를 충전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녀는 아침 일찍 일어나 반려견 깜지와 운동을 마치고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등지고 서서 붓질을 한다. 그리고 하나 혹은 두셋의 여인들이 모여 물감 묻은 앞치마를 두르면 따뜻한 커피 한 잔 나누며 서로의 꿈 이야기를 꺼내놓고 한참동안 수다를 나눈다.




김종희는 전직 간호사다
김 화백은 두 가지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 중 하나는 그녀가 수간호사 출신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일찍이 간호대학을 나와 구미 순천향병원에서 간호사 생활을 했다. 첫 월급 28만원을 받아서 1년치 미술학원비를 내고는 매일 학원을 다녔다. 미술대학에는 못 갔지만 매일 그림을 그리게 되어서 기뻤다. 그렇게 6년을 일하고 그녀는 안동병원으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인 미술수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90학번, 서른 세 살의 늦은 나이에 안동대학교와 계명대


학교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에돌아 온 길이지만 그녀는 자신이 간호사로 일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해한다. 간호사와 화가라는 두 가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전력이 그녀를 ‘나눌 수 있는 미술’을 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1993년 안동시종합사회복지관 미술교실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미술치료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학교부적응 학생들을 비롯해 농아, 알콜중독자, 자폐환자, 행동장애 성인들까지 그녀는 그림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는 삶을 살았다.
“그림은 혼자 즐거운 일이지만 미술치료는 나눌 수 있는 일이잖아요”
지금도 그녀는 금곡동 작업실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 미술치료와 상담을 하고 있다.
 
김종희는 마라토너다
김화백의 또 다른 특이한 이력은 그녀가 제법 뛰는 마라토너라는 사실이다. 42.195Km 완주 기록이 3시간 30분대면 대수롭다. 그녀는 간호대학을 다닐 때부터 마라톤을 했다고 한다. 요즘은 마라톤이라고 부르지만 그때는 그냥 달리기나 조깅으로 불리던 뜀박질, 그녀는 제 발로 뛰어가 강을 보고 들판을 보고 스쳐 지나가는 일상의 풍경들을 눈에 담았다.


그 뜀박질이 인연이 되어 47세의 늦은 나이에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도 했다. 11살 연하의 잘생기고 자상한 마라톤 동호인, 복되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마라톤은 그녀에게 참 잘 어울린다. 인생을 살아가는 긴 호흡이 닮았다. 잠시 호사하다가 주저앉곤 하는 나에게는 없는 긴 호흡,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몇 시간을 달려갈 수 있는 지구력이 그녀의 삶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녀는 남편이 사는 구미와 안동의 중간지점인 의성군 안평면에 신혼집을 차렸다.
그녀의 두 번째 작업실을 찾아간다.




새댁 김종희
안평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 산골로 접어드니 서너 채의 집이 보인다. 그 중 잘 생긴 집이 김 화백의 집이다. 마당엔 시원스럽게 잔디가 깔려있고 마당에서 보이는 옆집 창고 담벼락에 그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감나무가 있고 돌담이 있는 집. 그녀는 이 집을 시중가보다 싸게 샀다. 노후에 살려고 곱게 단장했다가 집을 내놓은 주인을 찾아가 ‘내가 당신이 살던 집을 아름답게 오래오래 지키며 살겠다’고 협박(?)해 자신의 셈법대로 값을 치렀다고 한다. 그리고는 전 주인이 더러 놀러 오기도 하고 가을이면 공들여 만든 쑥엑기스를 보내주기도 하며 지낸다고 하니 그녀도 어지간하다.


집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각자의 일터에서 주말이나 한 달에 한두 번 만나 알콩달콩 밥을 해 먹고 마당을 가꾸고 늦잠을 자고 그림을 그리는 집.
바로 열 한두 살 종희가 꿈꾸던 집이다.
김 화백은 이 집에 공을 많이 들였다. 작은 체구와는 달리 힘도 제법 센 모양이어서 손수 하천의 돌을 옮겨와 돌담을 쌓고 비가 오면 고무신을 떠내려 보낼 수 있는 수로도 만들었다. 돌 사이에 돌나물을 심어 봄 내내 뜯어먹고 지금은 노란 꽃이 소담스럽게 피었다. 손수 테이블보와 커튼을 만들어 달고 쪽벽에는 그의 그림으로 페인팅을 했다. 거실에서 내다보이는 옆집 창고 벽에는 새가 된 여인들을 그렸다. 48평, 제법 넓은 이 집은 김 화백의 옛 그림과 최근작을 함께 볼 수 있는 갤러리다.




그녀의 그림이 변했다
나는 그녀의 그림을 오래 전부터 보아왔다. 유학 전 여러 대학에 출강하며 그림을 그리던 그 시절, 그의 그림은 온통 유화물감이 덧칠해진 불투명의 막처럼 느껴졌다. 푸른 색과 붉은 색을 많이 썼으나 그 막은 분열된 자아처럼 종횡무진 무질서했고, 드러날 듯 드러나지 않는 실체를 들여다보다 지쳐서 자리를 뜨곤 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녀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나에게 보이고 나에게 보이는 것이 그녀에게 보이지 않는, 접점을 찾을 수없는 비구상의 사각, 작은 방에 그녀의 옛 그림 몇 점이 보인다.


어느 날 그녀가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미대를 나왔으나 정작 그림은 실컷 못 그리고 이 학교 저 학교로 강의를 다니는데 염증이 났을테고 탈출이 필요했으리라. 그리고 귀국 전 소식을 들었다. 나는 많이 궁금했다. 그녀는 프랑스에서 어떤 그림을 들고 돌아왔을까? 달려갔다.


훌쩍 커진 화폭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목이 긴 여인들, 기형의 새들, 아크릴 칼라가 만들어내는 시원한 코발트블루의 화폭은 칸딘스키 보다가는 조금 더 원색에 가깝고 고야 보다가는 좀 더 투명했다. 그녀는 자신의 화폭 속에서 눈에 뜨게 아방가르드해졌다. 피카소처럼 이지러진 수직의 가파른 형상들이 가득 들어찬 그녀의 화폭 앞에서 나는 더 궁금해지고 말았다. 도대체 프랑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졌는지.


“프랑스 유학이 직접적으로 제 그림을 변화시킨 건 아닌 것 같아요.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어요. 나는 왜 태어났을까? 왜 마라톤을 하게 되었을까? 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 방법을 몰랐을 때 나는 색을 가지고 논 것 같아요. 이야기하는 방법을 몰라서 내 속 이야기를 색으로 나타냈다면 이제는 스토리가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어요.”
그녀의 그림에는 눈도 코도 없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자신일 수도 있고 어제 쌈밥을 나눈 옆집 할머니일 수도 있다.


여자가 그림의 앞에 있고 남자는 꾸지게 뒤에 서 있다. 아버지일 수도 있고 유학 노잣돈을 선뜻 보태 준 오빠일 수도 있다. 마음대로 날개를 단 새들과 네 발 달린 짐승들은 틀림없이 누군가의 전생이다. 그러나 눈도 코도 없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고 웃기도 하고 슬픈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함께 새가 되어 날아가고 싶다고 매달리기도 한다.


의성에 살게 되면서 그녀가 옛 전설 속의 나라인 조문국에 빠져버린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녀는 조문국의 생성과 소멸에서 자신의 집안 이야기를 보았고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전설 속의 인물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본능적으로 화폭에 옮겨 적고 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조문국의 의상이 본듯이 그려진다. 신목과 공주와 공주를 둘러싼 시녀들과 슬픈 백성들이 100호짜리 캔버스를 가득 메운다. 그러고도 다음날이 되면 더 많은 백성들이 물동이를 이고 나타나고 지개작대기를 고아두고 서서는 자신의 타령을 풀어간다. 한동안 그녀는 의성과 안동을 오가며 사라진 나라를 다시 세울 작정이다.




화가 김종희
다시 안동으로 나오는 길, 그녀는 거칠게 차를 몬다. 그녀와 함께 이 길을 뛰어서 간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한다. 물론 내 걸음이 그녀를 따라잡을 수 없을 테지만.
“나에게 닥친 일을 거부하지 않아요. 일 하는데 관심이 있지 결과에도 별 관심이 없구요.”
무슨 말인가 했더니 이건 그녀의 사상이다. 가난할 때도 그랬지만 조금 여유가 생긴 지금도 그녀는 학생을 가르쳐서 번 돈, 옆집 꿀을 따주고 번 돈 같은 깨끗한 노동을 통해서 번 돈으로 물감을 산다고 한다. 그리고 그림을 그린다.


나이 60이 넘으면 ‘소중한 내 영혼인 내 그림들’이 대접받을 수 있는 미술관을 만들고 싶다. 그러나 그건 본인이 할 일은 아니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면 될 일이다. 지금 사는 집같은 편안한 곳에서 미술치료를 하는 요양원을 하고 싶은 생각도 있지만 그것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화가다. 자신이 화가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화가. 그래서 그녀는 열심히 그림을 그린다. 그녀에게 정작 중요한 것은 그림을 그리는 일이다. 갑자기 생각나서 갑자기 떠난 유학길처럼, 그녀는 그렇게 멋있는 할머니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국 전 그림보다 한층 탈색된 최근 그림들은 그의 이야기가 이제 단편소설의 편편을 넘어 농익어가는 느낌이다. 유장한 서사와 드넓은 평원이 있는 조문국의 이야기가 완성되면 다시 그녀를 만날 수 있으리다.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1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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