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어머니(글/류애란)

이 글을 쓴 류애란 씨는 계몽운동가요 항일운동가인 동산 류인식 선생의 증손녀로, 1939년 예안면 주진리 삼산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후에 인근 부포동의 진성이씨 집안으로 출가하여 독립유공자 이선호 선생의 자부가 되었습니다.


이 글은 류애란 씨가 해방과 한국전쟁, 좌우익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한 우리의 아픈 현대사 속에서 그와 가족이 겪었던 고난과 사랑을 담담하게 서술하여 지난 2005년 7월 24일, 87세 생신을 맞은 어머니께 헌사한 사모곡으로 원제는 ‘어머니 은혜’입니다.


류애란 씨의 어머니 조기석 여사는 영양의 한양조씨 집안에서 태어나 열여덟 살에 삼산의 전주류씨 가문으로 출가하여 소위 사상범으로 두 번에 걸쳐 14년간 옥살이를 한 남편 덕에 평생을 숨죽이며 살아왔습니다. 긴장된 일상, 힘겨운 가난을 감내 하면서도 자식 오남매를 반듯하게 길러낸 그 시대의 우리 어머니로 올해 세수 95회를 넘겼습니다. 감옥에서 나오던 날, 사위가 보는 앞에서 굳이 출가한 딸을 업고 강나루를 건너던 류애란 씨의 아버지는 2008년 89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린 시절 류애란 씨가 겪은 이 이야기는 어느 한 개인의 가족사를 넘어 우리의 아픈 현대사 속에 녹아있는 질곡의 세월을 오롯이 담아낸 역사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 글에서는 안동지방의 전통적 기풍과 반가 여인의 절제된 언행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 글을 실으면서 원제는 매체의 특성을 고려하여 두서 제목으로 고쳐 싣고 본문은 그대로 전재 하였습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등장인물들의 관계(촌수), 지명은 각주로 달아놓았습니다. -편집자




우리 어머니는 독립을 절규하는 3.1만세운동으로 온 나라가 들끓던 기미년 바로 오늘 태어나셨습니다. 만18세 되던 1937년 우리 집으로 우귀(于歸)하셨으니 그 세월이 얼마입니까.
당시는 일제의 탄압과 착취가 극에 달했던 때였습니다. 20리 넘는 길을 통학하는 도산초등학교 학생이었던 남편을 바라보며 어설프고 힘든 시집살이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대동아전쟁이 소용돌이 치던 왜정 말기에는 서울 소화공전(현 한양대학교)에 유학하는 아버지 때문에 늘 걱정이었습니다. 혹 학병에 끌려가지는 않을까? 조석이나 자시고 다니는지? 그러면서 할머니 모시고 우리 삼남매 키우며 삼산서 살았습니다.


1945년 8.15 광복을 맞이했습니다. 환희의 해방을 맞았으니 이제 안도의 한숨을 쉬고 근심걱정이 걷히려나? 했더니 사상이 무엇인지? 좌우익의 갈등으로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무슨 일을 꾸미고 다니는지? 아버지는 자주 집에 오시지도 않는데 순경들은 가위 매일 집으로 아버지를 찾으러 왔습니다. 무서워서 마음 편하게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아랫마을 개 짖는 소리만 들려도 우리는 “엄마! 종걸이 업고 다른 집으로 가요”하고 졸랐습니다. 빈 집에 우리 자매만 있기는 무서웠지만 아홉 살, 일곱 살 난 우리는 일찍 철이 들었던 모양으로, 어머니께 어린 동생 데리고 다른 집으로 피해 있으라 했습니다. 문풍지가 울고 마당에 낙엽 구르는 소리에 귀를 쫑긋하고 있으면 잠은 멀리멀리 달아났습니다.
쿵쿵 발자국 소리가 나고 어슴푸레한 달빛에 사람의 그림자들이 문에 비쳤습니다. 누군가가 축에 올라서는가 싶더니 억센 힘으로 문고리를 잡아당기면서 “어른들 어디 갔어? 빨리 말해!”하면서 쥐어박기라도 할 듯이 윽박질러도 우리는 “몰라요. 집에 아무도 없어요.” 하면서 무서움을 참았습니다. 그러니 이때 어머니의 근심은 어떠했겠습니까? 아버지 걱정, 우리 걱정, 고초를 감당하며 앞으로 살아가야할 걱정. 이런 혼란의 세월이 몇 해 흘렀습니다. 손꼽아보니 그때는 어머니가 서른도 되기 전인 새색시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고생은 이제 시작이었을 뿐입니다.


6.25 사변 직전에 서울에서 가족이 모여 사는 행복이 있었습니다마는 그것은 꿈같이 지나간 너무 짧은 세월이었습니다.
사변이 나고 집을 나간 아버지는 소식이 없고 폭격은 연일 계속되고 한강 쪽에서 포탄이 작렬하는 소리, 피난민이 골목길을 지내가는 발자국 소리, 우리는 아버지를 기다리다가 날이 밝았는데 9.28 수복이 되었습니다. 수복 후에도 평화스러운 서울은 아니었습니다. 인민군 부역자를 찾는다며 집집이 수색을 하고 서로 일러바치고 각박한 인심이었습니다. 언제 아버지가 오실까, 어머니는 밤낮 기다렸습니다. 기다림과 배 고품과 주위의 시선을 감당하는데 지친 어머니는 저희들을 데리고 고향인 예안면 주진리 삼산(1)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인도교가 끊어진 한강을 건너기 위해 가교로 갔으나 검문하는 경찰이 길을 막아섰습니다. ‘굶고 있는 이 어린 것들 데리고 고향으로 가려는 것이니 건너게 해 달라고 사정사정 하면서 어머니가 아까워서 입지도 못하던 양단 후루마기를 건네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저와 영란이를 앞세우고, 태어난 지 5~6개월 밖에 안 된 호야 들쳐 업고, 여섯 살 난 종걸이 손잡고 다섯 식구가 막막한 피난길을 걸어갔습니다.
아버지가 우리를 찾아올 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에 연신 뒤 돌아보며 떠나는 피난길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제법 무거운 보따리를 짊어지고 앞장서서 길을 잡아가면서 걸어갔습니다. 철도 일찍 들었지만 억척스러웠던 모양입니다.


영등포서 화물열차를 얻어 타고 대구까지 왔습니다. 주실 어머니 일가 되는 조준영(경북경찰청장)씨를 찾아가기로 했습니다. 조준영 씨는 일가일 뿐 아니라 처가로도 촌수가 있는 가까운 관계라고 들었습니다. 거기 가서 도움을 부탁하면 위급을 모면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경찰청을 물어물어 가는 중에 길에서 우연히 고림(2) 진외종조부(3)(애국지사 이원일)님을 만났습니다.
“이게 누구야! 난리통에 어떻게 살아있었던가?이 어린것들 사남매를 데리고 어떻게 무사히 여기까지 왔는가? 응? 그 사람은 소식이 없고?”
할아버지는 우리 사남매를 일일이 끌어안으시며 “그래, 됐다. 무사했으면 됐다. 아버지 소식도 곧 있을거구!” 하시면서 눈에 눈물이 고이셨습니다. 어머니도 우리도 할아버지와 같이 울었습니다.
우리는 조준영 경찰청장을 찾아갈 것을 그만두고 할아버지를 따라 할아버지 댁으로 갔습니다. 며칠 쉬고 다시 안동으로 왔습니다. 그때부터는 할아버지가 우리를 보호하며 데리고 다니신 것입니다. 우리는 와룡면 주계리 원강이에 있는 재종 존고모(4)님 댁으로 갔습니다. 할아버지는 "너희들은 여기서 기다리면 내가 미리 삼산 가서 너희들이 무사히 돌아오고 있다는 기별이라도 해야겠다."하시면서 먼저 삼산으로 떠나셨습니다.


벌써 고향에 다 온듯해서 할아버지가 떠나신 뒤 우리도 급한 마음에 곧 뒤따라 삼산으로 향했습니다. 이제 삼산이 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힘들고 무거운 다리를 끌면서도 "이제 다 왔다"는 생각을 하면서 걸으니 다리에 힘이 솟아나는 듯 했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했습니다.
노천마을(5)을 지나는데 이집 저집 굴뚝에 저녁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꼴짐 진 아이들이 우리를 힐끔힐끔 돌아다보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집 저집 굴뚝에는 저녁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몇 십리를 걸어왔으니 배도 고팠지만, 저녁연기를 보는 순간 밥그릇에 수북한 이밥이 생각났습니다. 이 길은 몇 해 전까지 저가 예안 초등학교를 다니던 길입니다. 박시골(6)재를 타래타래 넘었던 추억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바로 그때 계일(7) 할머니(종 증조모(8))가 멀리서 우리를 보고 손을 흔들며 허둥지둥 뛰어 오십니다. 고림 할아버지 연락을 받고 마중 나오시는구나! 하고 너무 반가웠습니다. "우리는 이제 살았다."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반가워하면서도 난처한 기색을 보이시더니“지금 산으로 들어와서는 안 되네. 동네 분위기가 어수선하니 삼산으로 들어오지 말고 내하고 계일 우리 친정집에 가서 쉬었다가 도계(9) 자네 친정으로 가는 것이 좋겠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영문도 모르는 아이들은 길바닥에 퍼질러 앉아 울었고, 어머니는 망연자실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때 세상은 그랬었고 인심도 그러했습니다. 우리를 걱정해서 집안이 모여 상의하고 할머니가 대책을 갖고 나오셔서 난감한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십자가를 지신 것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향만 가면 어떻게 하든 아이들 배 곯리지는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희망을 갖고 칭얼거리는 아이들 달래가며 천릿길을 멀다하지 않고 찾아왔다가 청천벽력 같은 낭패를 당했으니 어쩔 수 없이 그야말로 난민의 신세가 되어 오던 길을 돌아 계일로 갔습니다. 해가 빠진 늦은 시간, 다시 십리길을 걸어 밤 늦은 시간에 종 증조모님의 친정댁에 들어서기가 여간 뻐젓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할머니도 우리 다섯 식구를 데리고 친정에 들어서면서 얼마나 난처하셨겠습니까?


계일서 도계 외가까지는 장갈령(10)을 넘어 산길로 질러간다 해도 백리 길도 넘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우선 좀 더 가까운 입암면 연당(11) 존고모님(12) 댁으로 가서 쉬었다가 도계 외가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걸음 빠른 사람을 구해 연당 존고모님 댁에 미리 기별하고 우리는 뒤처져 산길로 들길로 걸어갔습니다. 이른 아침을 먹고 떠났지만, 저녁 늦은 시간 어둠이 사방에서 죄여오는 그런 시간에 우리는 연당 동구에 도착했습니다.
연당 할머니 식구들은 초롱불을 들고 도가(양조장)가 있는 곳까지 모두 마중 나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할머니는 우리 손을 일일이 잡고 얼굴을 비비며 반겨주셨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우두커니 서있는 엄마를 보고 “자네가 참 대단하네! 이 어린것들 4남매를 데리고 난리 통에 아무 모책도 없이 멀고 먼 길을 무사히 오다니, 자나 깨나 친정이 늘 걱정이었는데 이런 경사가 어디 있나? 아이들 배고플 터인데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빨리 집으로 가자.”하면서 데리고 나온 하인들에게 “너는 호야 받아 업고, 또 너는 애란이 짊어진 짐 보따리 받아들고 얼른 가자.”고 이끌어 주셨습니다.
삼산에서 마을로 들어서려다 당한 낭패와 그 동안 겪은 숱한 설움, 아버지 걱정이 한꺼번에 복받쳐 눈물이 자꾸 흘러내렸습니다.


연당서 몇몇일 지냈습니다. 할머니 댁 가족뿐 아니라 대소가는 물론 온 동네가 돌아가면서 우리 식구를 불러 저녁을 한다, 별식을 한다, 야단이었습니다. 우리 할머니가 연당 일문에서 점잔하고 처사를 훌륭하게 하여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모두 우리한테도 그렇게 잘 대해주었을 것입니다.
연당서 며칠 묵다가 영양 장날에 맞춰 도계 외가 집으로 떠났습니다. 할머니는 소달구지에 이것저것 살림에 쓰일 물건들을 실어주었고 어린 우리들은 달구지에 올라앉았습니다. 소풍이라도 가는 듯이 우리는 신났습니다. 연당 할머니 댁도 부잣집이었지만, 도계 우리 외가도 영양서 소문난 부잣집이었습니다. 수비들에 독보를 갖고 있을 정도인데, 남들은 말하기를 30리는 남의 땅을 밟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연당 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외숙모님은 연당으로 걸어오시다가 중도에서 우리와 만났습니다. 외숙모님 친정도 바로 우리 존고모 할머니 댁입니다. 옛날에는 혼인이 연 걸리듯이 왜 그렇게 했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외가에 온지도 상당한 기간이 지났습니다. 대가족 큰살림을 하시는 외숙모님은 바쁜 중에도 우리한테 신경을 많이 써 주었습니다. 혹시 눈치 보이고 불편한 것은 없을까? 그런 염려에서 따로 방을 내어주고 식량이며 이불이며 전부 챙겨 가위 살림을 차려주었습니다. 
당시는 엄마네 집인데 뭘! 하고 당연하다는 듯이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난리로 세상은 뒤숭숭한데 시누이가 아이들 갈아입힐 옷가지 하나 없이 어린 자식 넷이나 끌고 친정에 들이닥친다고 상상하면, 어쩔 도리가 없다고 해도 우리 외아지매 같이 활달하고 남을 배려하는 성격이 아니라면 그렇게나 살뜰하게 마음 써서 돌봐주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일월면 면장으로 계시던 우리 외아저씨(조석운씨)는 인품과 덕망이 높아 향내에서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우리를 업신여기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자기들끼리 모이면 "연당댁 삼산 류실이는 피난을 어떻게 친정으로 왔대?", "류서방은 어떻게 같이 못 왔을꼬.", "류서방은 사상이 다르잖아. 북으로 갔나부지 뭐!"하면서 쑥덕거렸을런지도 모르고, 어머니도 남들이 그런 말 하는 눈치를 챘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출가외인이라는데, 친정에서 잘 해주면 잘 해줄수록 미안하고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얼마를 지냈습니다. 연당 할머니한테서 인편에 연락이 왔습니다.
“어린것들 다 거두기도 힘들 텐데, 애란이는 연당으로 보내라. 우리 연이하고 동갑이고 하니 같이 놀고 학교도 같이 다니게.”
그래서 나는 연당으로 가서 입암초등학교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와 동생들하고 헤어지기가 죽기보다 싫었지만, 그런 내색도 하지 못했습니다.‘나 하나라도 연당으로 가면 엄마 고생이 좀 덜어질까? 동생들 먹이고 입히는 걱정이라도 좀 줄어들까?’그런 생각을 하면서 속마음을 감추고 천연덕스럽게 나를 연당으로 빨리 보내달라고 졸랐습니다. 어머니도 그런 저의 마음을 왜 몰랐을까 마는 하도 어득한 형편이라 저를 선선히 보내주셨습니다. 속으로 남모르게 많이 우셨을 겁니다.




그렇게 몇 해 살다가 우리 식구는 삼산으로 모였습니다. 어머니는 사변에 슬하를 모두 잃은 머든 할머니(종조모(13))를 만나 서로 위로하며 같이 살기로 했던 것입니다. 이런 형편을 일러 동병상련이라고 하면 마땅하다 할 것입니다. 저도 곧 삼산으로 왔습니다.
집이 없으니 조상 정자(삼산정(14))에서 살았습니다. 구들은 두텁고 외풍은 심하니 방은 얼음장같이 추웠지만 가족이 모여 사니 초석을 덮고 자도 견딜만 했습니다.


겨울을 넘기고 봄이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남 줬던 엇가리 밭을 찾아 농사를 지었습니다. 부잣집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자란 어머니가 언제 밭 메고 들일하는 그런 고생을 해 봤을까요. 손이 갈라져서 피가 나도록 일을 했으나 손에 바를 크림 하나 없었습니다. 밭을 갈기 위해 타성 집을 찾아다니며 밭갈이를 좀 해 달라고 칠촌 양자 빌듯 사정사정해서 밭을 갈면 품값을 줄 형편이 못되니 품앗이로 소품 따로 갚고 사람 품 따로 갚느라 몇몇일 씩 그 집 일을 해줘야 했습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한 번도 세월을 한탄하거나 아버지를 원망하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럭저럭 세월이 몇 해 흘러 어린 종걸이가 지게를 지고 산에 가서 나무를 끌어오는 것을 봤을 때 제일 속상해 했었는데, 그때도 아버지 원망을 하지 안했을까 모르는 일입니다.


1955년이던가? 어느 날 밤 아버지가 오셨습니다. 드러내놓고 반기고 좋아하지도 못했습니다. 반갑기에 앞서 걱정되는 폭풍우가 몰아올 거라고 짐작한 어머니는 "어쩌자고 왔느냐?"고 원망하는 듯이 보였습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 농사일에 찌든 어머니를 보시고 억장이 무너지는 듯 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드러내놓고 거리를 활보할 입장도 아니면서 대구 시청에 취직자리를 알아보겠다며 다녀오셨습니다. 나랏일도 나랏일이지만, 가족에 대한 책임과 가장으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자책감에 어쩔 도리가 없어 위험을 걱정할 여유도 없었던 모양입니다.
대구시청에 취직이 되어 출근 날짜만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가 대구에서 그만 구속되고 말았습니다. 그 무서운 반공법 위반이니 그 고문을 어떻게 감내하고 철창 마룻바닥에서 7년이라는 오랜 수감생활을 어떻게 견뎌내었습니까? 그러나 집에 있는 가족들도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변호사도 변변히 대지 못했고, 내복 한 벌도 사서 차입하지 못했고 면회 한번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이듬해 8월 종열이가 태어났습니다. 앞에 큰 할아버지는 경사라고 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산모가 국이라도 먹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아버지는 고생하고 계시는데 저는 부포(15)로 시집을 갔습니다. 저의 결혼이 아버지 어머니 마음을 더 아프게 했을 겁니다.
세월은 흘러 아버지가 형이 만기되어 집으로 오실 때 우리 내외가 마중을 나갔습니다. 예안 내앞 낙동강을 건너는데 물이 제법 많았습니다. 제가 보선을 벗고 물을 건널 채비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애란아! 내가 업고 건널게.”
“아버지 괜찮아요. 보기보다 강이 깊어요. 아버지나 조심해서 건너세요!”
그렇게 사양했지만 아버지는 기어코 나를 업고 물살 센 낙동강을 건넜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물살이 세고 모래에 발이 빠져 건너기 어려운데 무거운 저를 업고 한발 한발 떼놓기가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다 큰 딸을 등에 업고 강을 건너면서 내가 없는 동안 이것이 시집을 갔으니 제대로 가려 가지도 못했을 거고 또 혼일에 그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그런 생각을 하셨을 겁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내가 너를 업고 강을 건널 정도로 건강하게 돌아왔으니 걱정하지 마라. 하는 생각에서 기어이 업겠다고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없이 살아도 죄 값 다 치르고 보기에라도 건강하게 돌아오셨으니 마음이 훨훨 날아갈 것 같았습니다. 뭣이라도 해 보시겠다며 형무소에서 배운 기술로 안동서 가구제작소도 하고 했으나 처음부터 경험 없는 일이라 잘 되리라 믿지는 않았습니다.


5.16 후에는 다시 사회가 혼란하더니 삼산 동네가 쑥밭이 되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류양필 간첩사건으로 말입니다. 류양필은 아버지의 종고모(16) 되시니 그동안 만나기도 만났으려니와 그때는 죄가 있고 없고 간에 불문곡직하고 불고지죄로 대소가가 모두 잡혀갔던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도 다시 7년의 형을 살았습니다. 일곱 달도 무서운데 7년씩 두 번이나 갖은 악형을 당하는 고초를 겪으셨던 것입니다. 전기고문, 물고문을 당하면서 인내의 한계를 넘나들며 살아남으시지 않았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모두 살기 좋아졌다는 그 후 30여년의 세월 역시 어머니는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사변 때의 고생은 추억으로라도 이야기 할 수 있고 대동지환(大同之患)이라 남들도 비슷한 고생을 하기도 했지만, 그 이후의 고생은 차라리 연가하지 않는 것이 훨씬 좋을 것 같습니다.


어머니도 자식들한테 효도 받고 손자손녀들이 장성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지난 세월에 대한 보상과 위로를 받으셔야 되는데 아직 하나도 제구실을 못하고 있으니 죄송할 뿐입니다.
지금은 고향을 떠나 두 분이 수원에서 살고 계십니다. 객지에 살다가도 고향으로 환고 하셔야 될 연세에 어쩔 도리가 없어서였습니다. 자손이 있다 해도 각 곳에 흩어져 살고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니 자주 찾아뵙지도 근심을 덜어드리지도 못합니다.
그렇게 고생스럽게 사시면서도 어머니는 말씀 하시기를 "우리 형제 종반 중에 내가 제일 드러난 가문, 좋은 집으로 시집 왔다"고 시집 잘 온 자랑을 하십니다. 지금은 힘들고 어렵고 실망스러워도 빛나는 조상이 자랑스럽다는 자긍심으로 스스로 위안하며 살아가시는 모습이 오히려 가슴 아픕니다. 빛나는 조상에 자랑스러운 자손이 가득하면 얼마나 좋아하실 텐데…….


금년 들어 아버지는 병원을 자주 다니시고 입원도 하곤 하십니다. 그래서 아흔 가까우신 어머니가 병원도 따라다니고, 시간 맞게 약도 깨치고 챙겨 드립니다. 병원에서 몇몇일 씩 간병을 하고 계십니다. 어머니도 상노인인데 가당하기나 한 일입니까? 이런 말은 합당하지 않지만‘노인들이 가엽다. 측은하다’그런 생각이 듭니다.‘이러다가 어머니까지 병나시겠다.’고 하면‘나는 괜찮다’고 하시면서 ‘우리 걱정 하지마라’고 하십니다. 
지난여름에 서울 오셨을 때 이 서방이‘금년 장모 생신은 우리 집에서 한번 했으면 좋겠다.’고 하여 어머니께 여쭈어 봤더니“좋지 뭐! 그러면 너희 형제 새집으로 이사도 했고 하니 겸사겸사해서 모이도록 해라.”하셨습니다.
열이가 사방으로 연락하고 서울서 보다 청평 엄소리로 모이자고 하여 오늘 이렇게 모였습니다.
시장도 멀고 교통이 불편하기도 하거니와 어머니 앞에서 나이 이야기 하기는 뭣하지만 인제는 음식 솜씨가 전 같지 않아 맛깔스럽고 푸근한 것이 없습니다. 그걸사나 곰거리는 종열이가 준비해 왔고, 떡은 영란이가 했습니다. 그 밖에 안동, 대구서 준비해 온 찬거리를 그저 씻고 다듬어 차리기만 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먼 길에 오시느라 힘드셨을 일만 죄송합니다.


외람되이 저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살아오신 이력의 대강만 생각나는 대로 늘어놓았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그때 어렸던 동생들에게 한번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머니가 살아오신 이력의 일면일 뿐입니다.
20리 예안 장에 콩이나 팥 둬되 이고 가서 팔아가지고 국밥 한 그릇 못 사 자시고 우리한테 신길 신발 사들고 식은 땀 흘리며 박시골 재를 넘어오시던 어머니 모습이 오늘따라 생각납니다.
오늘 같은 날은 이렇게 아픈 이야기는 덮어둬야 하는데 괜히 어머니 마음만 아프게 하였다면 또 한 번의 불효를 보태게 됩니다.


우리 어머니의 은혜가 태산보다 더 높고, 바다보다 더 깊지 않습니까? 폭격이 그렇게 심했던 아비규환의 서울에서 우리 남매 손끝 하나 다치지 않게 지켜주셨던 분이 누구였습니까?
젊은 아녀자의 몸으로 있는 것이라고는 어린 아이 다섯뿐인데 경험 없는 농사일을 하면서 가문을 지켜주셨던 분이 누구였습니까?
우리를 키우고 우리 집을 지켜 오신 어머니 이력을 가끔씩은 되새겨 봐야 도리 같아서 중간 중간 단편적이지만 기억나는 대로 눈물로 적어 봅니다.  어머니 고맙습니다. 죄송합니다. 건강하세요.
-2005년 음력 7월 24일 불효여식 애란.<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144호>


 


-각주 목록


(1) 조선 후기의 문신인 삼산(三山) 류정원(柳正源)의 종택이 있는 전주류씨 삼산파 세거지
(2) 예안면 계곡리(옛 월곡면)에 있던 자연부락
(3) 아버지의 외조부 형제
(4) 할아버지의 6촌 자매
(5) 예안면 주진리에 속한 자연부락
(6) 주진나룻터에서 삼산으로 넘어오는 고갯길
(7) 예안면 계곡리의 자연부락명
(8) 증조 할아버지 형제의 아내
(9) 영양군 일월면 도계리/ 한양조씨 영양입향조 참판공 종택과 영양향교가 있는 마을
(10) 동으로 영양 북으로 봉화와 경계를 이루는, 예안면 동천리와 영양군 청기면 구통리를 잇는 고갯길
(11) 영양군 입암면의 한 마을. 동래정씨 집성촌으로 서석지가 있다
(12) 할아버지의 자매(아버지의 고모)
(13) 할아버지 형제의 아내(아버지의 백,숙모)
(14) 삼산마을에 있는, 조선 영조 때 대사간을 지낸 삼산 류정원이 지은 정자
(15) 진성이씨와 봉화금씨가 대성을 이루고 살던 예안면의 한 마을. 안동댐에 수몰되고 지금은 명맥만 남아있다
(16) 아버지의 4촌 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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