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동기동창˝ 손대철, 손아란 부녀(글/이미홍_객원기자)

안동대 식물의학과의 아빠와 딸

강의실에 들어가면 나란히 앉거나 앞뒤로 앉는다는, 안동대학 식물의학과의 소문난 짝꿍 손대철(54), 손아란(23) 부녀를 만나러 안동대학교를 찾은 날은 개나리가 막 피어나고 교정의 벚나무에 막 물이 오르고 있는 삼월의 초입이었다. 새학기가 시작된 교정은 쌀쌀한 봄 날씨에도 캠퍼스 특유의 파릇파릇한 활기를 띠고 있었는데, 수업 마치기를 기다리고 있자니 예쁘게 차려 입은 아란 씨와 잘나가는 늦깎이 대학생 아버지 대철 씨 부녀가 나란히 교정을 가로질러 우리에게로 왔다. 손대철 씨는 실제 나이보다 더 젊고 에너지가 넘쳐 보였고 엄마의 미모를 닮았다는 둘째딸 아란 씨는 그런 아버지와 쿵짝이 잘 맞는, 톡톡 튀는 유쾌한 처자였다. 이 두 사람이 그러니까 대학 동기동창이라는 말씀이다. 작년에는 4학년이었던 언니 수란(24) 씨까지 세 부녀가 나란히 같은 학과를 다녔었다고 한다.

제일 처음 내가 아란 씨에게 던진 말은 “아니, 어쩌다가 이렇게?”였다. “그러니까요. 저도 처음에는 정말 아니었다니까요. 그런데 어느새 세뇌가 돼서 그래, 그것도 괜찮겠다, 나도 언니하고 아빠가 다니는 과에 가볼까? 이렇게 됐죠 뭐. 그래서 작년에 편입을 했고요.”

그 옆에서 아버지 대철 씨의 정곡을 찌르는 한 마디,

“원래 계획은 원래 먼저 입학해서 다니고 있던 첫째가 있으니까 둘째하고 같이 입학해서 셋이 다니려고 했어요. 사실 첫째는 처음에 제가 같은 과에 입학하는 걸 반대했어요. 하필 그 많은 대학 다 놔두고 같은 대학 같은 과에 입학하려고 하느냐는 거죠. 그런데 제가 하고 싶은 공부가 이건데 과가 마침 여기밖에 없는 걸 어째요. 그래서 간신히 설득을 해서 둘째하고 같이 원서를 냈는데 쟤가 생각지도 못하게 떨어지고 저는 한 학기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죠. 두 해는 첫째하고 다니다가 작년에 얘가 삼학년에 편입해서 작년 1년은 그래도 셋이서 같이 다녔지만요.”

그러니까 2011년도 수능시험을 치른 아란 씨와 특례입학생으로 지원한 대철 씨가 나란히 신입생 환영회를 할 수도 있었을 뻔 했다는 이야기다.

“면접 보러 아빠하고 같이 들어갔어요. 그런데 저는 떨어지고 아빠는 합격했어요. 그때 저 정말 충격 먹었어요. 내가 이렇게 공부를 못 했나 솔직히 멘붕 상태였죠. 그래서 저는 2년 동안 전문대를 다니면서 건축 인테리어 공부를 했어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저는 그게 좋았어요. 어릴 때부터 농사, 농사 하시고 언니도 같은 과를 나왔는데 가족 사업을 위해서 나까지 같은 과를 가야 된다고, 아버지가 하시는 영농법인 일을 평생직장으로 같이해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거든요. 그런데 혼자 따로 독립을 해서 학교를 다니니까 생각보다 그게 더 좋았어요. 그 2년이 있었기에 지금 다시 아빠하고 같은 과로 편입을 해서 공부를 하는 게 더 좋은 거 같아요. 그전에는 아빠 말하는 대로는 절대 안 할 거라고, 나 하고 싶은 거 하고 살 거라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저만의 시간도 가져봤고, 제가 옆에서 아빠나 언니가 일하는 걸 보니 전망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거든요. 솔직히 아빠한테 설득 당해서 넘어간 건데 이제는 정말 꼼짝없이 농사 일 하면서 살게 됐어요.”



졸업한 첫째까지 작년에는 세 부녀가 한 강의실에

처음 3학년에 편입을 해서 아버지 대철씨와 수업을 같이 들으면서 처음에는 솔직히 신경도 많이 쓰이고 했는데 어느새 익숙해져서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한다. 수업 시간이면 앞자리에 앉아서 질문도 많이 하고 서슴없이 손을 들고 발표를 하는 대철 씨를 보면서 ‘우리 아빠한테 저런 적극적인 면이 있었구나’ 하는 것도, 친화력이 좋아서 자신이 없는 사이 어느새 동기생들을 비롯하여 학부 학생들의 맏이 노릇을 하시며 이런저런 일에 앞장도 서고 엠티나 축제 같은 학과 행사에 뒤에서 든든하게 서포트 해주시는 모습을 보면서 집에서의 엄하시기만 했던 아버지에 대한 거리감도 많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같이 머리 싸매고 공부를 하고 같이 시험을 치르면서 식구들 중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이가 된 두 사람이란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두 사람이 이심전심인 게 있었으니 바로 첫째 수란 씨에 관한 섭섭함이다. 두 사람의 공통된 원성은 한 마디로 시험에 관한한 수란 씨가 너무 깐깐하다는 말이다. 문제는 세 사람 중에서 수란 씨가 제일 공부를 잘했다는 것, 나이가 많아 암기력에 한계가 있다는 대철 씨와 비교하면 그래도 조금 더 낫다 자부하는 아란 씨는 시험 때만 되면 수란 씨를 설득(?)하기 위해 애를 썼다고 한다. 야식도 공급하고 아부도 하고 어깨도 주물러주며 시험 치는 날이면 수란 씨 뒤에 아란 씨, 아버지 대철 씨 순으로 나란히 앉았다고 한다. 앞에서 슬쩍 보여주기만 하면 알아서 떡밥을 챙길 요량으로. 그러나 수란 씨는 끄떡도 없었고 아란 씨와 대철 씨는 사람이 너무 냉정하다느니 하는 원망을 했다고 한다. 이런 걸 두고 동병상련이라 할까, 요즘도 시험 때만 되면 유난히 더 친해지는 두 사람이란다. 아란 씨를 믿는 대철 씨 쪽이 좀 더 잘할 수밖에 없는 기간이기도 하단다. 둘이 의기투하배 쑥덕거리고 있으면 옆에서 언니 수란 씨가 행여나 요행 바라지 말라고 뭐라 하고, 그럴때면 원리원칙주의자라느니 식구끼리 너무하다느니 구시렁구시렁거리는 두 사람이다. 

“사실 같이 수업을 듣는 전공과목 같은 경우에는 허드렛일이라도 리포트나 과제 준비할 때 제가 가끔 아빠 걸 도와주는데 언니는 그러지 말라고 해요. 그런데 아빠가 도와준 거 다 계산해 준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못 받았어요. 대신 맛있는 거 사주시거나 하시죠.”



 




남자친구 사귀기, 책값 떼먹기...다 들통나요

그렇지만 편입하고 학교생활이 쉬운 게 아니라는 데 아란 씨는 무엇보다 아버지가 밑밥을 잔뜩 뿌려놓은 덕분에 늦게 편입을 했으면서도 자연스럽게 학과에 어울릴 수 있게 되어 그게 제일 고맙다고 한다.

“제가 편입을 하기 벌써 전부터 우리 둘째 딸 편입할거다, 오면 잘해줘라 말하고 교수님들에게도 우리 딸 편입하면 잘 봐 주십사고 부탁하고 다니시고 그랬더라고요. 그전에 언니랑 아빠가 같이 수업을 듣기도 했고 해서 이미 면역이 되어 있었나 봐요. 그래서 제가 편입을 했더니 다들 당연하다는 듯이 대하고, 아빠하고 딸이라고 특별취급 하지도 않고 이제 과동기생들도 적응된 지 오래라서 그냥 다 동기예요. 그런데 아빠가 가끔 가드가 심하신 것도 있긴 있어요. 아빠 때문에 솔직히 남자 친구 만드는 게 힘들었거든요. 처음에는 학과 밖에서는 서로 모른 척 하고 그러기도 했는데 이제는 다 소문이 나서 굳이 숨기거나 그런 거 없구요. 전에 다른 학교 다닐 때는 책 값 같은 거 부풀리거나 학교 행사 뒤풀이 있다고 친구들과 늦게까지 놀고 가기도 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일정이 모든 게 다 오픈되어 있고 책도 언니 꺼 물려받고 그래서 얄짤 없다는 거 그게 가장 큰 단점이고요, 지내보니까 아빠 덕분에 안심하고 학교생활 할 수 있는 거 하고 집에서 엄마가 만든 반찬 가져다주시는 거, 가끔 엄마나 식구들 몰래 용돈을 더 주신다든가 하는 등등 장점도 많아서 요새는 불만 없어요.”




아빠만 믿어 “농사가 제일 훌륭하고 비전있어”

가만 들어보니 대철 씨의 간섭만 빼면 아란 씨로서는 나쁘지 않은 동고동락인 셈이다. 아니 실보다 득이 많은 동기생 아빠다. 그러면 대철 씨는 어떨까?

“저야 원래부터 제 꿈이었고 앞날을 내다보고 계획을 세우고 시작한 일이고 애들을 설득한 건데 다행히 잘 따라줘서 딸 둘하고 같은 공부를 한다는 게 즐겁지요. 사실 제가 일만 하고 공부를 놓은 지 좀 되다 보니까 공부 따라가는 게 쉽지 않을 때도 있어요. 일 때문에 수업 빠지는 날도 더러 있고요. 실기는 제가 더 낫지만 이론은 우리 딸이 더 낫지요. 그래서 아란이 덕을 많이 보지요. 그런데 쟤가 지 엄마한테 이 아빠 학교생활을 다 이야기해요. 특히 저처럼 늦게 대학 다니는 여자 동창들과 점심이라도 같이 먹거나 차라도 한 잔 했다 하면 다 일러요. 그렇다고 제가 특별히 사생활 터치하거나 그런 건 없어요. 알아서 잘 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제가 이런 이야기는 늘 하죠. 이제 졸업하면 같이 집에서 하는 영농법인 일할 거니까 착실히 일 배워서 나중에 영농사업 한 파트 맡아하면서, 자기 땅 가지고 농사짓는 건실한 놈하고 결혼해서 그 사업 물려받아 키워가라고요. 그러니까 섣불리 연애하지 말라고요.”

듣고 보니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한창 아리따운 이십대의 아가씨더러 연애하지 말고 영농사업 일 돕다가 같이 일 할 농사꾼 총각하고 결혼하라는 말이다. 물론 말 한다고 다 고대로 이루어진다는 보장도 없고 지금은 그저 바람일 뿐이라지만, 어째 이 아저씨 하는 품으로 봐서는 그리 밀고 나갈 요량인지도 모른다 싶다. 그런데 참 어지간히도 마르고 닳도록 세뇌를 시키셨는지 아란 씨도 이제는 그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는 거 같다. 이건 뭐 일 잘하는 튼튼한 머슴 들이는 것도 아니고 잘만 하면 현대판 ‘봄 봄’ 한 번 찍을 판이다.

“아빠가 어렸을 때부터 농사가 제일 훌륭하고 편한 일이다. 농사꾼에게 시집가라 그랬어요. 지금도 자꾸 땅 부자 농사꾼 총각한테 시집가라고 그래요. 그리고 주말이고 방학이고 시간만 나면 몸빼 입고 밭에 나가 일해야 하다보니까 누구 만날 사람도 없고 만날 시간도 없어요. 일하면 아빠가 품삯을 주시니까 뭐를 사거나 친구들이랑 어디 놀러갈려고 해도 돈이 필요하니까 일단 일을 해야 되요. 아빠가 이 일 다 마치면 얼마 주겠다 하고 돈을 걸어요. 일을 할 때 아빠가 백만 원이 묶인 돈다발을 들고 흔드시는 거예요. 그러면 그 돈이 탐이 나서 정말 열심히 일을 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일 다 하고 나면 저금해서 나중에 준다 하고 일부만 조금 주고 그런 적도 많고요. 졸업하고 어디 취직할 생각 말고 집에서 일하면 월급도 많이 주고 나중에는 연봉 1억이 되게 해 준다고 해서 저도 딴

맘 안 먹으려고 생각은 하는데 모르겠어요. 언니가 지금 졸업하고 농약방 일도 하고 묘종 키우는 일도 하는데 월급 받고 일하거든요. 30대에 1억 연봉 보장한다는 아빠 말 믿고 저도 일 하려고 하는데, 저는 월급 많이 받고 싶은데 아빠가 실제로 얼마나 주실지 모르겠어요.”



문경에서 영농법인 운영하는 대철 씨

사실 대철 씨는 문경에서 농약사를 운영하면서 땅을 사서 과수원을 비롯하여 육묘 사업까지 하다가 점점 규모가 커지면서 가족영농법인을 만들어 운영해오고 있다. 한 마디로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고 몸이 둘이라도 부족할 정도로 할 일도 많은 그다. 그런데도 그가 딸들과 같이 입학을 한 건 식물의학과가 영농 관련 학과이고 전문적인 지식을 배워두면 사업에도 도움이 되겠다 싶은 욕심이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사실 무엇보다 가장 큰 것은 그의 못다한 배움에 대한 한 때문이었다.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직업전선에 뛰어들던 그때 어린 대철 씨는 생각했다고 한다. 내가 돈을 벌어서 생활이 기반을 잡고 식구들이 살만해지면 가고 싶었던 대학을 가겠다고. 그리고 실제로 가정을 이루고 사업이 기반을 잡아가면서 그 꿈은 더욱 구체화되었고 그 시기를 그는 오십 살로 잡았다고 한다. 더 이상 머리가 굳기 전에, 그리고 딸들과 함께 대학 교정을 누리기를 그는 꿈꾸었고 그의 나이 오십 세가 되던 2011년 그는 딸과 함께 안동대학교 교정에 섰다.



늦깍이 학생, 대학에 꼭 와야만 했다

그랬다. 그는 대학에 꼭 와야만 했다. 사실 전문적인 지식이야 딸들이 배워도 되고 뛰어난 직원을 써도 되고 자문을 구해도 된다. 그런데도 굳어가는 머리를 억지로 두드려 깨우면서까지, 딸들 앞에서 아버지의 체면이 구겨지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는 꼭 대학에 와야만 했다. 그건 어렸던 자신과의 부적과도 같은 오래된 약속이었다.

“원래 저희 부모님이 두 분 다 장애가 있으셨고 연세도 많으셨어요. 집안 형편도 어려웠고요. 초가집에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그런 집에 살다 보니, 중학교도 겨우겨우 마칠 형편이니 자연히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돈을 벌어야 했어요. 그때 생각했지요. 언젠가 돈을 모아 내 힘으로 학교를 꼭 다시 가겠다고. 대학까지 하고 말리라고.”

실제로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안 해본 일 없이 한시도 쉬지 않고 일을 했다. 그에게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우리가 학교에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배웠었는데, 저도 상급학교 진학을 못하게 된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하고 나름대로 제 인생 계획을 세운 거죠. 계획을 세우고 돈을 모아야겠다 싶어 우선 일자리를 찾아 나섰어요. 그렇게 해서 제일 처음에 한 일이 문경 광산에서 청소며 심부름을 하는 급사 일이었어요. 하루 일당이 910원이었는데 광산에서 여섯 달 꼬박 일한 월급을 모아서 제가 그때 십오만 원을 주고 시골에 조그만 집을 샀어요. 부모님께 사 드린 거죠.

저희 아버지가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끌려가 사시다가 6.25 전후해서 귀국해서 결혼해서 사시다가 상처하시고 우리 어머니하고 결혼하셔서 저를 낳으셨는데, 전쟁통에 장애도 생기고 살아오신 세월에 굴곡이 많으셨어요. 저를 많이 아끼셨는데 뒷바라지를 못해주셔서 늘 미안해 하셨죠. 그런데 제가 집 사드고 얼마 안 있다가 돌아가셨어요. 아버지가 고령의 노인이셔서 어릴 때부터 사실상 제가 가장 노릇을 해야 했어요. 그래도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니까 어깨가 더 무거워졌죠. 그래서 안 되겠다 제대로 된 직장 잡아서 돈 벌어야겠다 생각했죠. 모아 놓은 이백만 원을 들고 서울로 갔어요. 아무래도 서울 쪽이 일자리도 많고 돈 벌기가 더 나을 거라고 생각한 거죠. 그때만 해도 서울에 제조업 공장들이 많았어요. 가죽 공장도 다니고 사출 공장도 다녔죠. 그러면서 방송통신고등학교를 다녔어요.”

그런데 사출 공장이 문을 닫게 되어서 다른 직장을 알아보던 와중에 군대 징집 영장이 나왔다. 그래서 하던 공부를 접고 군대에 갔다. 그리고 그는 군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인생계획을 재점검하고 취업 준비를 했다.

14년 농협직원으로 일하다 농약사 차리며 독립

제대를 한 그가 택한 직장은 문경 농협이었다. 처음에는 계약직으로 들어갔지만 시험을 쳐서 농협 정직원이 된 그는 14년 동안 농협에서 일하면서 열과 성을 다해 열심히 뛴 결과 영업 실적이 뛰어나 우수사원 표창도 받고 인정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노조활동으로 인한 조직과의 갈등, 그리고 무엇보다 농협이라는 조직 속에서 자신이 더 커가는 데 한계가 있다는 걸 느꼈다. 그런데 그가 농협에 있으면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농약사 일이었다. 농협이 아무래도 종자 판매나 농약 판매와 무관하지 않다보니 농약사를 운영하는 분들과도 연관이 많았는데, 그는 거기에서 나름대로 전망을 본 것이었다. 그래서 과감하게 농협에 사표를 던졌다. 동료들의 반응은 한 마디로 정신 나갔느냐는 것이었다. 누구는 못 들어가서 난리인 정년이 보장된 안정적인 금융권 직장을 나가서 장사를 한다는 그를 다들 말렸다. 처음 그의 사표는 반려됐다. 동료들과 그의 영업 능역을 인정해준 상사가 그를 단념시키려고 설득을 했지만 그는 자신이 있었다. 판로 확보에 자신도 있었고 농약사를 잘만 운영한다면 농협 직원 월급 몇 배를 벌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표 수리가 안 되자 그는 전무님께 단독면담을 요청했다. 그리고 자신의 계획을 말하며 오히려 윗분을 설득했다. 그렇게 그는 월급쟁이의 길을 버리고 문경읍내의  농약사 사장님이 됐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농약사 사장님이 되고 돈을 벌어 집을 사고 아들 딸 낳고 잘 사는 것을 보고 돌아가셨다 하니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저는 무슨 일을 할 때 항상 계획을 세워놓고 차근차근 준비를 해서 하지, 하루아침에 무작정 저지르거나 하지는 않아요. 제가 농협에 근무하면서 보니까 이게 전망이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제

가 비록 중졸이었지만 죽어라 공부해서 영농기술자격증인 산업보호기사 자격증을 땄어요. 기술자격증이라 이게 있으면 1억을 팔았을 때 2500만 원 정도가 수수료가 더 생기더라고요. 그때 당시 제 연봉이랑 비슷했는데 1억 어치만 팔아도 그 돈이 생기니까 더 많이 팔면 월급보다 당연히 나은 거죠. 그리고 저는 자신이 있었거든요. 농협에 근무한 14년이 그냥 허비한 게 아니고 종자 관련, 농약 관련 노하우도 많이 쌓았고, 인맥과 판매처도 어느 정도는 확보를 해 놓은 셈이었던 거죠. 그리고 지금 18년이 지났는데 그때의 제 판단이 맞았다는 게 증명이 된 셈이죠. 집도 사고 땅도 사고 가족영농조합법인도 만들어 사업을 더 확장해 나가고 있는 중이니까요. 지금은 농협에 가면 큰 고객이라고 지점장실에도 가고 옛날 동료들이 부러워하지요.”




언젠가는 저 집을 사고 말리라

사실 농약사를 시작하고서 얼마동안은 집안살림살이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돈을 모아 가게를 넓힐 계획에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시장 통에 위치한 농약상회 뒤쪽에 문경에서 알아주는 역사가 오래인 대지가 200여 평이 넘는 큰 한약방이 있었다. 잘 지은 집에 무엇보다 집터가 넓어 여러 사람이 탐을 내는 자리였다. 그 집이 눈에 들어온 뒤 그는 선물로 들어온 녹용을 들고 한약방 주인어른을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 안면을 텄다. 그리고 돌아 나오면서 그 집을 쳐다보며 언젠가는 저 집을 사고 말리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 집 앞을 지날 때면 ‘이거는 내 거다’하고 침을 한 번 탁 뱉어서 찜을 해 놓았다. 그리고는 열심히 돈을 모았다. 자고로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다.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그 어른이 갑자기 돌아가시고 사정이 급했던 안주인이 그 집을 팔려고 내놓았다. 모아놓은 돈을 들고 그 길로 안주인을 찾아갔다. 그리고 한약방을 확장하는 공사를 하다가 마무리가 덜 된 상태에서 어른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부채가 남아 있었던 그 집을 그는 시가보다 훨씬 싸게 인수할 수 있었다. 그 집을 사서 농약상회를 확장하고 집 공사를 마무리해서 이사를 했다. 지나고 보니 그때가 그의 사업의 기반이 틀을 잡기 시작한 시점이었다고 한다.



외상값 못갚아 쩔쩔매던 아버지, 아픈 유년의 기억

그 전에 살았던 옛집에 대한 아란 씨의 기억은 엄마 발치에서 웅크려 자던 잠자리에서 시작된다. 시장통에 있던 먹고 살기 어렵던 시절 대충 지어올린 고만고만한 비가 새던 집.

“제 기억에 어릴 때 살던 집이 어둡고 방이 정말 좁았어요. 작은 방 두 개에 할머니까지 모시고 일곱 식구가 살았는데, 그때 막내 동생까지 태어나서 잠자리가 더 좁아져서 잘 때면 엄마 발 있는데 가서 자기도 하고 그랬어요. 비 오면 비 다 새서 친구들 데리고 오기가 싫었어요. 제가 5학년 때 새 집으로 이사를 갔는데 그때 정말 좋아서 동생들이랑 춤을 췄던 생각이 나요.”

그가 농약사를 하면서 지금까지 18년 동안 변하지 않고 지켜 온 원칙이 있는데 그건 절대 농약 값이나 종자 대금 외상값을 재촉하지 않는 것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영농자금을 내어 쓰셨는데 영농자금을 받으러 온 직원들에게 아버지가 쩔쩔매시던 그 모습이 너무 마음 아프더라고요. 외상을 못 갚는 그 집에도 그때의 저 같은 그런 애들이 있을 거잖아요. 그래서 저는 절대 외상 독촉을 하지 않았어요. 물론 안 갚는 사람들도 있어요. 한 이십 프로 정도 되는 거 같더라고요. 제가 계산을 해보니까 그렇게 해서 못 받은 돈이 농약상 한 18년 동안 한 5억 정도 되더라고요. 그래도 지금도 저는 절대 돈 갚으라고 독촉은 안 해요. 일을 할 때는 악착같은 면도 있고 끝까지 해내는 면도 있지만 없는 사람들 마음을 저는 아니까요.”

한 번은 셋째가 중학생일 때 가방에 흉기를 들고 다니다가 들킨 적이 있다고 한다. 알고 봤더니 동네 형들한테 일 년 가까이나 돈을 빼앗기는 생활이 계속되자 자신만의 방어 차원에서 가지고 다닌 것이었다. 시골 동네라 사는 게 다들 고만고만했는데 사업하는 대철 씨네가 형편이 좀 낫다 보니까 용돈을 넉넉하게 받는 걸 알고 그런 것이었다. 그는 우선 아들을 불러서 뺏긴 사람도 잘못이라고 혼내고서 그 애들을 불러서 다른 말없이 한 동네에서 서로 사이좋게 지내라며 맛있는 것도 사 주고 용돈을 주며 돈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자신을 찾아오라고 했단다. 그 뒤로는 애를 안 괴롭히는 일도 없었고 물론 용돈 달라고 찾아오는 아이들도 없었다고 한다. 가난을 겪어본 대철 씨만의 교육법이었다.




중1때 세운 목표, 50억 모으기

대철 씨의 인생 플랜 중 하나는 80세까지 50억을 모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같아서는 한 이십 년쯤 목표를 앞당기게 될 것 같기도 하다. 대철 씨의 50억 모으기 프로젝트는 그가 중학교 일학년 때 시작되었다고 했다.

“제가 중1때 뉴스에서 정주영 명예회장이 한 달에 660억을 번다고 나오더라고요. 그때 제가 저 스스로 목표를 세웠어요. 나는 가진 것도 없고 밑천도 없으니까 재벌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평생 동안 50억은 모으겠다 하고요. 젊어서 열심히 벌어서 그 돈을 기반으로 제대로 된 사업을 하면 한 개인으로서 50억 모으는 게 불가능한 계획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이제 어느 정도 기반은 닦았다고 저 스스로 생각을 해요. 중간에 기간을 앞당겨도 되겠다 생각한 것도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고요. 그런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저는 끊임없이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배우고 투자하고 그러면서 쉬지 않고 달려올 수 있었고, 이제 반 정도 왔고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지금까지는 제 인생계획대로 어느 정도 따라왔다고 봐요. 제가 선택하고 투자한 이 길이 맞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영농 사업에 미래 투자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판단을 했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도 다 이쪽 방면으로 학교를 보낸 거고요.”

일에 있어서나 인생 목표를 이루는 데 있어서나 그 이름만큼이나 참으로 대차고도 강철 같은 의지를 가진 대철 씨가 아닐 수 없다. 사남매 중 밑의 두 아이들이라고 그의 가족영농사업을 위한 야심찬 대업을 피해갈 수는 없다. 

지금 고1인 셋째는 참고로 한국생명과학고등학교에서 원예를 전공하고 있다. 본인은 요리에 취미가 있어 조리학과를 가고 싶어했지만, 아버지의 뒤를 이어 농업후계자 하기 싫으면 재산 포기각서를 쓰라는 아버지의 말에 며칠을 고민하더니 결국 원예학과를 선택했다고 한다. 농업계 고등학교의 경우 요즘은 학생들이 전공 선택에 따라 특별전형으로 대학도 같은 계통으로 진학을 하기 쉬워 대학까지 공부를 시켜 과수를 비롯해서 각종 원예작물 분야에서 사업을 확장시켜 나가길 희망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사천 평이 넘는 넓은 과수원을 보여주면서 ‘여기가 니 땅이다 니 꺼 될 거니까 열심히 해라.’ 이렇게 세뇌를 시켰다는 대철 씨다.

그런데 여기서 예외가 있으니 막내 오란이다. 늦둥이 막내는 중2인데 막내에게만은 그도 어쩔 수 없는지 막내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할 참이란다. 그런데 아란 씨의 말인즉슨, 막내는 농사일에 젬병이라 일을 시켜 놓으면 오히려 망쳐 놓거나 언니들 뒷손이 가게 만들기 때문에 그런 복을 받은 거라고, 그런데 더 크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도 그 말이 맞지 싶다. 집안 사업인데 농사일은 안 시켜도 시킬 것은 많을 것이기에.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지금은 잠정 보류상태라고 봐야 하겠다. 어쩌면 연예인을 꿈꾸는 막내의 앞날은 아직은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미지수이기에 이 집안에 하나쯤 특별한 예외가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문경에서 안동까지, 등록금만큼 나가는 거마비

학교 앞에서 자취를 하고 있는 아란 씨와 달리 대철 씨는 수업이 있는 날이면 문경에서 안동대학이 있는 송천까지 택시를 대절해서 다닌다. 아빠가 학교 안 나오면 대학 등록금만큼이 그냥 남는다는 말처럼 문경에서 안동까지 택시로 다니는 요금이 만만치 않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다르다.

“일이 많다 보니까 피곤할 때가 많은데 피곤한 상태에서 장거리 운전하는 게 오히려 손해예요. 사고 날 위험성도 있고 저는 차타고 오가면서 사업 구상도 하고 휴식도 취하고 그러거든요. 나머지 시간에는 일해야죠. 차량 유지하려면 이것저것 신경 쓰고 유지비용도 많이 들고 오히려 이게 저한테는 더 실용적이에요. 운전하고 오시는 분도 잘 아는 형님이신데 그분은 돈 벌어 좋고 저는 안전하게 다니고 같이 이야기 나누며 오가서 좋지요. 이제 4학년인데 졸업장이라는 건 남들도 다 있는 거고 하나라도 더 사업에 도움이 될 걸 배워야겠다 싶어서 지금 안동대학에서 운영하고 있는 농업사관학교 2년 과정을 같이 듣고 있어요. 이왕 돈 들여서 다니는 학교 하나라도 더 보고 들으려고요.”

아이러니 한건 그 택시기사 형님도 작게나마 사과 농사를 짓고 있는데, 그의 이야기를 듣고 감화(?) 되어서 농업사관학교에 등록을 해서 요즘은 같이 수업을 듣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전공 수업이 있는 날은 강의가 끝날 때까지 교내에 대기 모드이신데, 뒷산도 오르고 도서관에서 책도 읽고 하는데 기사님 말씀이 대철 씨 태우고 안동대학을 오가면서 보고 듣는 것도 많고 배우는 것도 많고 젊은이들 가득한 캠퍼스도 좋다고. 사실 요즘 택시도 벌이가 옛날 같지 않은데 대철 씨 수업 있는 날은 그도 돈도 벌고 공부도 하고 콧김도 쐬는 날이라고 하니 대철 씨의 대학생활의 가장 확실한 증인이자 수혜자이지 싶다.

 




험한 길 아빠가 닦아 놓을테니 같이 걷자고 하죠

“제가 온갖 일을 다 해 봤지만 농사만한 직업이 없어요. 이제는 다 영농도 기계화가 되었고요. 문경만 해도 억 대 넘는 농사꾼들 정말 많아요. 제가 지금 사과 농사 사천 평, 오미자 농사 팔백 평에, 배추 호박, 오이, 가지, 같은 모종 육묘 사업을 크게 하고 있는데 수익성도 있고 전망도 좋아서 규모를 조금씩 늘려가고 있어요. 임대해서 짓는 것까지 이것저것 합해서 지금 농사짓는 게 2만여 평 정도 되는데 앞으로 더 확장할 거예요. 특히 앞으로는 농업정책이 모든 육묘를 지금 벼 재배처럼 대규모로 재배해서 각 농가와 연결해서 계약 재배해서 제공해주는 방식으로 바뀌기 때문에 육묘사업은 점점 커질 거예요. 여기에다 꽃무지, 귀뚜라미 같은 곤충을 길러 사료용과 식용 등으로 6차 가공, 유통까지 포함하는 곤충사업도 생각하고 있는데 제가 여기 둘째보고 너는 나중에 곤충사업 분야 맡으라고 했어요. 둘째가 곤충도 좋아하고 앞으로 대체식량으로서 곤충 사육 사업이 유망해서 돈도 많이 벌 수 있다고 설득하고 있어요. 나중에는 직원들 두고 일꾼들 관리하면서 사업할 날이 있을 거예요. 제가 30대에 억대 연봉 장담한다니까요. 길만 잘 찾으면 농업 산업의 미래는 밝아요. 실제로 요즘도 해외여행 다니는 사람들 중 농사꾼들 많아요.”

천하지대본 농사라, 농업에서 미래를 찾은 대철 씨의 철썩 같은 믿음이다. 물론 그렇다. 그래도 시골에서 지금도 아버지가 농사를 짓고 계셔 농사가 뭔지 조금 아는 내 입장에서 보자면 아무리 살기 좋아지고 벌이가 좋고 농사 일이 기계화 전산화가 되었어도 생물은, 무릇 생명이 있는 것들은 사람의 손과 정성으로 크는 것이기에, 농사가 돈도 벌고 착하고 좋은 직업이라고 해도 아리따운 아가씨가 하기에 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고 수란 씨, 아란 씨 대신 외쳐는 주고 싶다.



졸업 후에도 함께 할 동기동창

비록 기꺼이 부모 그늘에서 전공 살려 일도 하고 돈도 벌면서 오늘도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수란 씨, 그리고 이제 곧 그 대열에 합류할 아란 씨, 선크림 듬뿍 바르고 몸빼 입고 커다란 농사용 가리개 챙모자 쓰고 열심히 일하는 요즘 아가씨들 같지 않은 자매가 어찌 이쁘지 않을까마는 그래도 그 비주얼은 생각만 해도 짠하다.

참고로 우리 집도 농기계 많고 우리 자랄 때 아버지 수박 참외 원예작물 농사 많이 지으셨고, 고추, 호박, 토마토 모종도 많이 키워 팔았다. 일할 때는 편한 옷이 최고라서 아지매들 같은 옷 입고 농약상에서 주는 가리개 모자 쓰고도 그 위에 수건 덮어쓰고 일하는 게 어떤 건지 아는 여자 일인으로서, 두 딸을 든든한 지원군으로 얻은 법인대표 대철 씨에게 월급 많이 주시라고 꼭 부탁하고 싶다. 정말로 웬만한 대기업 직장인 부럽지 않게  연봉 챙겨줘서 딸들이 어디 나가서도 고개 빳빳이 들고 다닐 수 있게 해 주실 거라고 믿고 싶다. 나중에 시집갈 때 한 몫 챙겨주시는 것도 좋지만 월급 빵빵하게 주는 걸 더 추천 드린다. 이 점, 연봉 협상에 임하는 수란 씨, 아란 씨의 건투를 비는 바이다.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15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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