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선비와 갈필葛筆(글/서수용_한국고문헌연구소장, 본지 편집위원장)

조선시대 어느 초야의 선비 집에서는 칡 줄기를 잘라 그 끝을 두드려 붓을 만든 이들이 적지 않았다. 먹물이 잘 먹지도, 또 글씨가 잘 써지지도 않는 거친 붓으로 글씨를 쓰면서 그 혹독했을 가난과 사투했을 그들의 정신을 기려 ‘선비정신’이라 했을 것이다. 

서울 인사동에서 평생 붓을 만든 장인의 갈필 작품을 운현궁 특별전시실에서 감상한 적이 있다. 칡뿌리가 아닌 칡 줄기를 오래도록 두드려 만들었다는 설명도 그곳에서 직접 들었다.

하루에 천 글자를 쓰며 “벼루 세 개를 먹으로 갈아 구멍을 내고야 말겠다.”다고 맹세한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7). 그 역시 형편이 어려웠던 시절 갈필葛筆을 만들었고 그 붓을 들어서 특유의 초서 획을 힘차게 내리그었을 것이다.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이란 이도 있었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손자인 그는 아우인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1629~1689)과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유배되자 화천 곡운산谷雲山에 은거하였고, 기사환국 후 김수항이 사약을 받자 다시는 속세에 나아가지 않았다. 글씨로 이름 높았던 그는 특히 예서隸書로 득명한 이다. ‘갈필팔분서葛筆八分書’는 화음동에 은거하며 추구했던 조선 후기 지성의 격이 어떠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최고의 작품이다. 

조선 시대 갈필葛筆 서체의 최고봉은 역시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이라고 본다. 그는 갈필과 관련된 시 한 수를 남기고 있다. 



「산 밖의 일은 알지 못하네 不知山外事」



아침 해가 동쪽 산마루로 떠오르니      朝日上東嶺

창 앞으론 산안개 피어오르네           煙霞生戶牖

세속의 일들은 내 알지 못하니          不知山外事

그저 갈필에 먹 묻혀 과두문자 쓰는 걸.  墨葛寫蝌蚪 




미수는 옛것을 특히 좋아해 지구간知舊間의 편지나 만필漫筆이라 할지라도 과두문자蝌蚪文字의 획으로 예서隸書를 즐겨 썼다. 서애 류성룡 선생 종택 사랑 대청마루 위에 높다랗게 걸린 충효당忠孝堂이라는 세 글자를 바라보면 그 글자 모양이 완연히 자연 그대로의 모습인 듯해 감탄이 절로 생긴다. 갈필葛筆은 처사處士에게 제격이다.

그런데 ‘갈필’이라고 하면 생소하다. 서법 상으로 갈필은 먹물의 사용을 억제하여 마른 듯한 상태의 붓으로 그리는 기법부터 생각하게 된다. 먹을 푹 찍어 쓰는 윤필潤筆과 다른 필법을 말한다. 이는 ‘갈필渴筆’이다. 갈필葛筆, 갈필渴筆 모두에는 자획에 비백飛白이 많다. 비백이란 마치 비로 쓴 것처럼 자획이 잘게 갈라져 보이기 때문에 필세가 비동飛動하는 느낌을 받는다.  

영주 소수서원 경내에 있는 소수박물관에서는 ‘묵향을 남긴 영주 선비 석당石堂 김종호(金宗鎬, 1901~1985)’특별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전시회 안내 포스터에는 석당이 평생 썼던 갓과 분판粉板 그리고 붓 더미 속에 한 자루의 몽당 갈필이 놓여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예스러워 실로 처연悽然하기까지 했다. 소백 산중에서 선비의 길을 가며 맞았을 평생의 간난신고艱難辛苦와 얼마간의 성취成就가 겹쳐졌기 때문이었다. 

전시장은 현대적으로 잘 꾸며져 있었고 전시 공간마다에는 묵향이 피어오르는 듯한 작품과  선비의 격을 느끼기에 충분한 유품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가운데 빛바랜 흑백사진 몇 장은 오래도록 초야의 선비가 어떤 모습이었던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노년에 망건을 쓰고 상투를 튼 상태로 바짝 조저앉아 소매를 걷어 붙인 상태로 악필惡筆한 손을 힘차게 저어가며 글씨 쓰기에 골몰하고 있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석당의 서예 작품 가운데 인구에 회자된 것은 그가 44세 때(1944)에 쓴 부석사 안양루의 ‘安養樓’ 현판 글씨다. 석당은 일제강점기에 ‘5대 국필國筆’로 손꼽혔다 한다. 당시 조선 총독이 조선의 명필 다섯 사람을 초청하였는데 석당 또한 그 중에 들었다는데서 근거한다 했다. 

실행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불현듯 일제의 초청을 받았던 석당의 처신이 궁금했다. 당시 경북북부지역의 뜻있는 선비들은 조국 광복을 위해 국내에서는 물론 북만주와 상해 그리고 시베리아 동토에까지 망명해가며 목숨을 걸고 투쟁했었다. 그리하여 그분들은 마침내 살신성인을 통해 겨레의 별인 애국선열이 되었다. 

석당의 처신은 어떠했던가? 석당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기 3년 전인 1942년 ‘한·중·일 서도전’에 특선으로 뽑힌 이력도 있다. 소백산 자락에서 나고 자랐던 가난한 선비인 석당은 ‘5대 국필’에 뽑혔고 또 한·중·일 서도전 ‘특선’에 들었다. 이것은 사소한 일상은 아니었다고 본다. 과연 선비정신으로 충만했던 당시의 이 고을 선비들이 그러한 경선에 즐겨 참여했을까 하는 생각만은 지울 수 없다. 문득 임시정부 초대국무령까지 지냈던 석주 이상룡 선생과 만주의 맹호로 이름 높았던 일송 김동삼, 그리고 동산 류인식 선생의 지향과 선택이 떠올랐다.[향토문화의사랑방 안동1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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