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장과 함께 살아온 권오전 할아버지의 50년 세월(글/이미홍 - 객원기자)
반세기를 일기와 함께한 권오전 할아버지 안동시 평화동에 살고 있는 권오전 할아버지는 1934년 5월 9일생이다. 올해로 73세가 되는데, 73년을 살아오면서 철들고 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54년째 일기를 써오고 있다. 일기란 본시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서 공개하는 데 뜻을 두지 않기 때문에, 때로는 사실에 대한 적나라하고도 연속적인 기록으로 개인의 역사이면서 동시에 역사적 사회적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나이가 들어 간혹 자서전이나 회고록 같은 문집을 발간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데, 그런 책들에는 아무래도 자기 과시나 겉멋이 들어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일기는 애초에 쓸 때에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향한 독백이기에 그 진실성 면에서 앞서고 꾸밈이 없는 것이 오히려 더 흥미롭다. 물론 때로는 지루하고 단조로운 면도 있지만 세심한 관찰과 솔직한 어투로 쓰여진 진솔한 일기는 우리의 관심을 끌고도 남는다. 그런 의미에서 권오전 할아버지의 일기는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우리가 권 할아버지의 일기장을 펼쳤을 때 나는 두 가지 면에 놀랐다. 우선 하루도 빠짐없이 빼곡하게 정자로 채워진 그 양에 놀랐고 그 내용의 세심함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세계기네스감이지만 공식등록절차 힘들어
2001년에 그는 기네스사에 편지를 보냈었다고 한다. 일기를 오래 쓴 것으로 기네스북에 등록을 할 수 있는지 문의하는 내용의 편지였다. 그런데 좀체 답장이 오지 않아 조카를 통해 알아보았더니 한국에 있는 기네스 지부가 경제적 어려움으로 철수를 해서 이리저리 알아보다가 스위스 본사에 있는 담당자와 연결이 되었다. 담당자 말이 현재 일기를 가장 오래 쓴 것으로 등록된 사람은 독일 사람으로 36년을 계속해서 쓴 사람인데 이미 작고한 상태라고 했다. 만약 확인만 가능하다면 그의 기네스 등록은 문제가 없다는 답변이었다. 그런데 절차상 본사에서 직접 사람을 파견해서 확인 작업을 해야만 한다고 했다.
일기의 경우 사적인 일기 내용은 보지 않고 일기가 제 날짜에 쓰여진 게 맞는 지가 중요하다고 했다. 컴퓨터에 연도별로 각 나라별 기후가 입력되어 있어서 그 날 그 날 쓴 것인지 한꺼번에 몰아서 쓴 것인지 까지 확인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파견하는 사람들의 체재비는 의뢰하는 측에서 부담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알아보니 최소 기본경비만 해도 일인당 백 만 원 정도가 필요했다. 혹시나 싶어서 기네스의 문을 두드렸던 그였지만 그 정도의 돈을 쓰면서까지 굳이 등록을 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아쉽지만 그는 기네스 등록을 포기했다. 그렇지만 그는 비공식적으로는 자신이 가장 오랫동안 일기를 써 온 사실을 인정받은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했다. 애초에 기네스북을 염두에 두고 일기를 쓴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글을 쓰면서 한 가지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은 한국기네스지부가 철수되기 전인 97년에 권 할아버지보다 먼저 일기를 오래 쓴 것으로 기네스사의 문을 두드려 97년 한국기네스 인증서를 획득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1938년생인 박래욱이라는 분인데 97년 당시 45년간을 일기를 써오고 있다고 나와 있었다. 그리고 2003년에는 일기를 책으로 엮어 출판한 사실까지 있었다. 물론 그 분도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한국기네스사가 문을 닫은 뒤로 기네스 본사의 인증서를 획득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권 할아버지가 기네스 본사에 연락을 했을 때 확인 절차를 밟으면 등록이 가능하다는 답변을 했을 것이다. 어쨌든 얼추 계산을 해 보니 그분도 지금까지 계속해서 일기를 쓰고 있다면 53,4년이 다 되어간다는 결론이 나왔다. 참으로 대단한 분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누가 더 오래 되었나를 따지기 전에 비슷한 시대를 살아낸 두 사람의 일기장 속에 녹아 있을 각자가 걸어온 삶의 발자취가 서로 어떻게 다를 지가 참으로 궁금했다. 무릇 모든 사람에게는 타인의 은밀한 영역을 훔쳐보고 싶은 심리가 있다 했던가, 두 사람의 일기를 나란히 놓고 볼 수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해봤다. 그러나 그건 당장은 어려운 일이고 그러니 나는 권오전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일기장 이야기나 해 보기로 한다.



떠꺼머리시절, 선생님 칭찬에 쓰기 시작한 일기
권 할아버지가 작심하고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53년도부터라고 한다. 일련번호가 붙은 채 서랍장 안에 차곡차곡 정렬되어 있는 50여권의 일기책 중 첫 번째 권에 1953년이라는 표시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53년 1월 1일부터 2006년 6월 현재까지 54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써 온 것이다.
처음 일기를 본격적으로 써봐야겠다 생각하게 된 건 고등학교 졸업반 무렵이었다고. 그가 안동 농림학교에 다닐 때였는데 겨울방학 때 일기를 써오라는 게 있었다고 한다.
“그때 일기를 쓰면서, 만약 그날 차를 끓여 먹었으면 노트 한쪽에다 풍로에 찻주전자를 올려놓은 그림을 그려 넣고 오늘 누가 왔는데 차를 끓여 먹었다고 적고, 또 어느 날은 오늘은 농사일을 무얼 거들어줬다 적고는 그 옆에 농기구나 아버지를 도와 일하는 모습을 그려 넣고. 또 그 당시에 미군들이 많이 들어와서 영주 통로로 우리 동네 앞을 지나가고는 했는데 그걸 보고 짚차도 그리고 미군들이 마을 앞을 지나갔다고 쓰고 그랬지요. 방학 끝나고 일기장을 제출했더니 담임선생님이 보시고는 교무실로 불러요. 일기를 참 잘 썼다고, 내 보기에 니가 그림에 소질이 있는 거 같은데 미술 선생님한테 가서 지도를 한 번 받아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 갔더니 미술 선생님이 보시고는 나한테 포스터 그리는 일을 맡겨 주더군요. 당시에 미신타파 운동이 한창이었는데 그걸 포스터로 한 번 그려보라고 하시는 거래요. 미신이라고 적힌 나무 밑동을 도끼로 찍어 넘기는 뭐 그런 그림이었는데 아무튼 미술 선생님이 대충 초안을 잡아 주시기는 했지만 며칠을 걸려서 완성한 포스터 그림을 보시고 미술 선생님이 아주 잘 그렸다고 하시면서 그 그림을 학교 복도에 걸어 놓으셨어. 그걸 보고 자신감을 좀 가졌지요. 그 길로 아하 내가 미술을 하든지, 일기를 써야겠다 하는 생각을 했지요. 그 당시 형편에 미술을 계속 하기는 어려워서 우선 하기 쉬운 일기를 쓰기 시작했지.”
아이들의 재주를 용케도 알아보고 해 주시는 선생님의 한 마디의 칭찬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실감하는 순간이다. 선생님에게는 비록 그게 지나가는 한 순간의 칭찬일지라도 아이의 마음에는 그 한 순간이 하나의 점으로 찍혀 남는다. 그리고 그 점은 아이의 마음 속에서 점점 자라 거대한 공룡이 되기도 하고 한 마리 나비가 되어 날아오르기도 한다. 고로 아이들에게는 무조건 칭찬을 해 줄 일이다.


 




귀신 잡는 해병시절에도,
굴곡 많은 세월에도 놓지 않았던 일기장
6.25가 끝나고 휴전이 되던 해인 53년에 학교를 졸업한 그는 곧바로 학도병으로 해군에 지원해 가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작정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전에도 일기를 썼는데, 그전까지는 노트에 쓰다 말다 했는데, 군대에 가게 되면서 일기장을 사서 그때부터 날짜가 적힌 일기장에 매일매일 쓰기 시작했지. 시간이 날 때마다 쓰고, 보초 서면서도 쓰고, 훈련 나갈 때도 일기장을 꼭 가지고 다녔지. 군대 생활이 규칙적어서 제대할 때까지 그렇게 하다 보니 어느새 일기 쓰는 게 습관이 돼서 아예 몸에 익어버린 거지. 그 뒤로 쭉 그냥 하루 일과 중의 하나로 굳어진 셈이지.”
그런데 알고 보니 그의 학도병 지원에는 아픈 가족사에 얽힌 이야기가 하나 더 숨어 있었다. 6.25때 마을에 인민군이 들어왔다. 그때 위로 두 형이 국군으로 복무하고 있어서 그의 아버지는 인민재판에 부쳐졌다. 인민군들이 협조하면 살려주마 했다. 그래서 살기 위해 아버지는 인민군에 협조하는 편을 택했다. 그들은 아버지에게 인민위원장이라는 완장을 채워줬다. 그리고 수복이 됐다.
수복이 되자마자 아버지는 동네 사람들에게 끌려가 매를 맞았다. 게 중에는 항렬이 낮은 일가붙이도 있었다. 그걸 보고 그는 속으로 눈물을 삼켜야 했다. 그리고 그는 학교를 마치고 학도병에 지원을 했다. 첫 휴가를 나왔을 때 그는 그 일가붙이를 찾아가 기어코 분풀이를 하고 만다. 죽지 않을 정도로 상대를 때려준 것이다.
그전부터 그런 이야기들을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으나 그저 어느 먼 곳의 이야기려니 생각하거나 역사책이나 전쟁 영화에서나 보았을 그런 이야기들을 본인의 생생한 목소리로 듣는 건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충격의 파장은 생각보다 컸다.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는 자신이 한 일까지 그 모든 일들을 일기에 다 썼다고 했다. 그의 일기장들 속에는 또 어떤 이야기들이 들어 있을까.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가 분명하지 않았던 전쟁이었다. 이야기를 듣는 우리가 이럴진대, 그 순간 그 자리에 있었던, 그 시대를 살아낸 우리네 아버지 어머니들의 가슴은 어땠을까?
비슷한 사연들을 간직한 이들이 어디 한 둘일까? 아마도 만신창이가 되었을 그 많은 사연들을 가슴에 묻고 울고 웃으며 우리들을 길러내셨을 터이다. 그리고 결코 쉽지 않은 이야기임에도 잠시 망설이다 사실을 담담하게 이야기해 준 할아버지께 말해드리고 싶다. 그 어려운 세월 사시느라 힘드셨겠다고. 그랬다. 그는 일제시대에 태어나서 해방과 6.25를 거쳤고 유신시대와 군사 정권 시대를 지나 이른바 민주화 정권 시절도 다 살아낸 사람이었다. 그제서야 그의 일기가 한 개인의 하찮은 사생활일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도병을 마치고 고향에서 몇 년간 농사를 짓다가 농촌에서 이렇게 살아서는 발전이 없겠다 싶어서 안동 시내로 나왔다. 그 때가 결혼을 한 직후였는데 그때 초등학교 교사인 부인의 근무지가 마침 안동이어서 자연스럽게 안동에 나와 자리를 잡게 되었던 것이라고 했다. 
“그때 시내로 나와서 계속해서 안동서 살게 된 거지. 나는 시내로 나와서 첨에는 다른 일을 하다가 68년부터 예비군 중대장을 하게 됐어요. 전두환 대통령 들어와서 정년이 돼서 그만두었으니까 오래 했지요. 내가 중대장으로 있으면서 일 열심히 했다고 표창도 많이 탔어요. 대통령 표창도 받고 국무총리 표창도 받고 포장도 타고, 육군참모총장상, 군사령관 표창도 많이 탔어요. 남들이 뭐라 하든 나는 예비군 중대장을 지내면서 내 딴에는 참 열심히 했거든요. 그걸 인정을 받은 셈이지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고? 일기장만 들춰보면 돼
그의 유별난 일기 사랑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다 보니, 지인들 중에 간혹 옛날 일을 물어오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옛날 일을 이야기하다가 서로 기억이 틀려 다툼이라도 생길라치면 그의 일기에다 대고 판정을 요구하기도 한다. 
“동창들이나 지인들 중에서 간혹 특별한 일이 있어서 와서 그때 일의 전후사정이 어떻게 된 것인지 확인 좀 해달라고 할 때가 있어요. 그럴 때면 그 해의 일기장을 찾아서 확인을 해주기도 하고 그래요. 그런 일이 많은 건 아니고 나이가 들다보니 기억이 가물가물해져서 친구들끼리도 기억이 서로 틀리고 그럴 때면 일기에 혹 그 일이 적혀 있는지 한 번 확인해 달라고 그러기도 하고 그래요.”
언젠가 갑자기 아파서 병원에 입원을 하러 가면서도 아파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부인을 닦달해 일기장부터 챙겨간 것은 물론이고, 병원에 입원해서 글씨를 쓸 힘조차 없는데도 기어코 그 날 날짜 페이지를 펴라고 해서는 억지로 팔을 들어 ‘입원’이라고 크게 두 글자를 쓰고서야 누운 그였다. 집안에 상을 당했을 때에도 빠뜨리지 않고 일기를 쓴 그이고 보니 여행을 갈 때도 제일 먼저 챙기는 건 당연히 일기장이다. 여행가서는 그냥 일상적인 일기는 일기대로 쓰고 여행 간 건 또 여행 간 것대로 따로 기록하는 여행일기를 따로 쓴다.



정보문서로 오인, 비행기 탑승전 조사받기도
95년에 미국 워싱턴에서 휴전 기념으로 6.25참전용사비 건립 개막식을 할 적에 한국의 참전용사 100명을 초청한 일이 있었는데 그가 그때 경북대표로 참가를 한 일이 있었다. 일본을 경유해 가는 비행기여서 일본에서 1시간을 쉬는 동안 비행기에서 내릴 때 작은 가방을 들고 내렸는데, 다시 탑승을 할 때 가방 조사를 했다고 한다. 그때 가방 속에 든 일기를 보고 무슨 정보문서인가하고 조사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결혼기념일 자식들 생일, 제사와 같은 특별한 일들은 연중행사, 월중행사, 그런 식으로 이중 삼중으로 다이어리에 따로 또 기록을 해 놓았다. 일종의 개인연표라고 해도 좋을, 요점정리를 해 놓은 부록이 따로 있는 셈이다. ‘2006년 3월 1일, 외손주 태어나다’라고 쓰인 연표를 보고 그 날 일기를 찾아보면 자세한 소감이 적혀있는 식이다. 그가 일기에 들이는 공이 어지간함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따로 이렇게 정리까지 해 놓을 생각을 한 것은 나이가 들고 일기장이 차곡차곡 쌓여가면서 점점 일기 내용을 기억하는 일이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본인도 기억하기 힘드니 누군가 물어도 한참을 이리저리 일일이 뒤적거려 찾아야 할 정도가 되었고, 말은 안했지만 이러다가는 50년 넘는 역사를 기록한 일기장이 자칫 애물단지가 되어 굴러다닐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싹트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일기를 한 눈에 보기 쉽게 정리할 생각을 하고 97년도부터 시작을 한 것이었다. 마음으로야 옛날 일기도 다 정리를 하고 싶지만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요하는 일이라 그건 우선 접어두고 그때부터 그런 식으로 정리를 해오고 있는데, 이제는 이력이 붙어서 일기를 쓰고 그날그날 바로 요점정리 다이어리에 한 줄로 정리를 하는 것으로 그만이다.
그가 하루에 일기나 이런 저런 기록에 투자하는 시간은 대략 삼 십 여분 정도. 요즘은 거기다 외손자에 대한 정기적인 기록까지 더해져 시간이 조금 늘어난 것이란다. 이층에 같이 사는 큰딸네가 3월에 아들을 낳았는데, 외할아버지의 지극한 사랑 덕분에 그동안의 성장기록이 벌써 장난이 아니다. 성장 일기에, 일주일에 한 장씩 찍어서 정리하는 성장 앨범에. 자식이라고는 딸이 둘인데 둘째는 직장 생활한다고 멀리 집 떠나 있고 큰 딸은 출가해서 따로 사는 걸 아무래도 외로워서 안 되겠어서 불러들여 놓았다. 아침저녁으로 힘든 줄 모르고 아래위층을 오르내리는 외할아버지의 사랑을 훗날 외손주가 십 분지 일이나마 알까마는 내리사랑이라 그저 할애비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그 누가 말리겠는가.



책장 속 낡은 50년전의 일기장, 삶의 반추
“일기를 쓴다고 뭐 특별히 내놓고 자랑할 일이나 좋은 점이 있다거나 이런 거는 없어요. 그저 내가 좋아서 쓰는 거죠. 오히려 걱정이 되지. 내 생각을 솔직하게 쓰다보이 혹시 우리 식구들이 보고 상처를 받지 않을까, 또 내가 좋지 못한 일을 했을 때 그게 탄로가 나지 않을까 싶은 걱정도 되고. 다행히 우리 집사람도 배운 사람이라 일기는 아예 볼 생각을 않더라고. 일기래야 그 날 한 일도 적고, 특별한 일이 없을 때는 TV에서 본 이야기나 정치 이야기도 쓰고 그때그때 시끄러웠던 사건 같은 거에 대한 내 나름대로 생각도 쓰고 그런 거지. 한 가지 내 스스로 생각하기에 나쁜 짓을 좀 덜하게 되는 거 같애요. 내 자신한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으니까 아무래도 나쁜 일은 안하려고 하지요. 사실 처음에 기네스사에 연락을 할 때도 내 혼자 속으로 걱정되는 게, 만약 일기 내용을 공개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거였어요. 내가 한 나쁜 짓이나 친척들이나 남을 흉본 것 이런 것들을 보고 당사자들이 상처를 받으면 어쩌나 하는 거며, 심지어는 그 무렵 일기장에 김영삼 대통령 욕을 많이 했었는데 이걸 정부에서 알면 뭐라고 할까 하는 걱정을 했어요. 다행히 일기 내용은 안 본다고 해서 마음을 놓았지만요.”
그런 걱정부터 했다니 참 어지간히도 솔직하게 쓰셨나 보다. 그런데 정색을 하고 진지하게 그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어린아이마냥 순진한 모습이 엿보인다. 그래서 허락을 얻어 일기 몇 편을 슬쩍 엿보았더니, 과연 은근히 걱정이 될 법도 하다 싶다. 


올해 초에 쓴 지인에 관한 일기 토막을 보자. 직설적이고 솔직한 성품이 그대로 드러난다.
-○○ 편으로 대구 소식을 들었다. 며칠 전이 ○○ 생신이었는데, 부산에 있는 셋째 딸과 삼형제가 모두 와서 생신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며느리 되는 이들이 한 사람도 참석하지 않았다고 했다. 시아버지 되는 자, 아무리 화가 난들 며느리더러 ○년,○년 하였으니 요즘 젊은 여자들이 누가 좋아하겠으며 누가 생일잔치에 오고 싶겠는가. 자식들도 마지못해 오긴 왔으되 그 마음이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


다음은 결혼한 직후에 쓴 일기의 한 부분이다.
-우리들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서 멀리서 온 처형들이 떠나게 될 모양이다. 그리고 동조씨(아내)는 고대를 한다고 해서 같이 영주엘 가게 되었다. 결혼 후 처음으로 같이 기차를 타고서 가게 되었다. 하루 종일 있다가 처가에 들러보니 고단하기 한이 없다. 나의 신체도 건강한 편이 못 되나보다. 나의 아내인 동조씨도 건강한 체가 못 된다. 학창 시절 때나 약혼시절만 하여도 보기에는 건강하였는데, 막상 결혼을 하고보니 몸이 아주 약하다. 무슨 일을 시키고 할려고 해도 애처로운 것이 마음이 내키지를 아니한다. 한 방에서 수침을 하여도 미안하고 마음 놓고 손이 가지를 아니한다. -


거울 속에 자신을 비추어 보던 어느 시인처럼 매일 매일을 이렇게 일기장 속에 기록된 자신의 모습과 마주하며 살아온 셈이니 그 솔직함과 진지함이 일면 당연하다 싶기도 하다.


내 삶의 기록, 옹골차게 정리해서 남기고파
어느새 앞으로 살아갈 날들보다 살아온 날이 더 많은 그이다 보니 평생 분신처럼 애지중지 함께해 온 일기장이 마음에 걸린다.
“내가 죽고 나면 자식들이 이거 뭐 사진이고 일기고 다 불태워 없애버릴 거란 말이래. 그래 내 한국국학진흥원에 이야기를 했더니만, 산 사람의 것은 안 되고 죽은 뒤에 기증을 하면 받아줄 수 있다고 하더라꼬. 그래 애들한테도 내 죽거들랑 일기장을 한국국학진흥원에다 기증을 해서 보관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부탁을 해 놓았어.”
말하는 양을 보니 그래 놓고도 쉬이 마음이 안 놓이는 눈치다. 
지난 날 어쩌다 부부 싸움을 하는 일이라도 있을 때면 일기장은 때로 그에게 든든한 무기이자 증인이 되어주기도 했다. 상대가 한 말이나 행동을 일일이 기록해 놓은 쪽이 아무래도 싸움에서 주도권을 잡기 십상인 법, 일기를 펴놓고 조목조목 짚어가며 따지는 데야 당할 재간이 있을 리 없다. 아니나 다를까 부부 싸움할 때 종종 일기 덕을 봤다고 웃으며 인정을 한다. 
매년 12월 말이 되면 그는 동네 문방구에 나가 다음 해 일기장을 두툼한 것으로 한 권 장만한다. 그러고 나면 일 년이 든든하다. 
요즘은 약초를 갈아놓은 시골 밭에도 나갔다가 2층에 있는 외손자도 보고 화단도 돌보고 하면서 소일하고 있다. 그리고 저녁이면 어김없이 책상 앞에 앉아 그날 한 일을 더듬으며 일기를 쓴다. 그는 오늘도 그렇게 그의 54권 째 일기장을 채워가고 있다. <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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