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봉재사(글/윤천근 - 안동대 교수)

안동에서 북쪽으로 뻗은 퇴계로를 통해 나아가다 보면, 길은 철로와 만난다. 길 위로 철도가 지나가는 굴다리를 넘으면, 그곳이 와룡면 서지리이다. 남행하던 중앙선 철로는 안동 경계에 접어들면서 동향하여 굽어 돌다가 낙동강 쪽으로 나아가 안동을 남쪽으로 싸돌며 나아간다. 바로 그 철길이 동향으로 굽어 도는 곳이 서지리인 것이다.
서지리에서 분지는 삼각형으로 열린다. 와룡의 산천이 모두 그러하지만, 서지리에서도 낮은 산은 구불거리며 사방으로 뻗어나가고, 길은 산줄기를 따라 어지럽게 돌아 나가며, 분지는 좁직하게 그 사이에 펼쳐진다. 오리의 발 사이에 붙어 있는 물갈퀴 같은 형상이라고나 할까? 서지리의 좁직한 삼각형 분지 남쪽면은 잠시 동행하는 철길과 그 너머에 철길 보다 더 높은 키로 동서 방향으로 치달리는 산줄기에 의하여 차단된다. 북쪽면의 중앙 부위로는 와룡에서 안동 쪽으로 뻗은 산줄기의 끝이 봉긋하게 튀어나오며 멈추어 서고, 그 좌우로는 갈라진 산줄기가 둘러막은 모습을 취하고 있다. 봉긋하게 튀어나오며 멈추어선 봉우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학봉 김성일의 묘소이다. 그 아래쪽의 분지와 만나는 지점에는 마을이 위치한다. 마을 안, 학봉 묘소에서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재사가 있다.


바깥에서 본 서지재사
재사는 작고 아담한 규모이다. 남동 방향으로 조금 자세를 틀고 있다. 재사 앞에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의성김씨 서지재사
중요민속자료 제182호  안동시 와룡면 서지리 
이 건물은 학봉 김성일의 묘제를 지내기 위한 재사로서 학봉의 묘소가 있는 산 동편 기슭 동남향에 위치해 있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5칸이며, ㅁ자형이다. 평지 건축수법이므로 2층 건물로 아래에는 광, 대문간, 외양간 등을 두고 위에는 누마루를 두었다. 이곳은 제사 후에 음복석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전면을 다락집으로 꾸며 ㅁ자형 재사를 경사지에건축한 수법이 특이하다. 1700년대 건축물로 추정한다.


재사는 안내문의 기록대로 정면 5칸, 측면 5칸의 정4각형 구조이다. 동서남북으로 건물이 둘러서 있고, 그 가운데에 좁은 사각형의 안마당이 자리 잡고 있다. 정면에서 보았을 때, 재사는 2층 구조이다. 정면 위편의 지붕은 양쪽으로 동 서 측의 건물 3각형 지붕 옆면이 솟아 있고, 그 사이에 앞 건물의 지붕이 옆으로 펼쳐져 있는 모습이다. 양쪽이 대칭으로 삼각형 모양의 뿔을 올려 세우고 있는 형상인 것이다.


앞쪽의 것은 누마루 건물이다. 1층과 2층은 다른 모습을 하고 있고, 각 층에서도 대칭과 균형의 미학은 조금씩 무너져 있다. 1층은 중앙에 정문을 두고 양측으로 두 칸씩 벌려 세웠다. 정문은 작고, 허술한 구조이다. 규모를 갖춘 대문이라고 하기 보다는 평범한 나무판자를 두 쪽 달아 놓았다고 하는 편이 적당할 정도이다. 대문의 양쪽으로는 기둥과의 사이에 종으로 한쪽의 판자가 붙어 있다. 판자에는 바깥쪽으로 짧은 횡목이 둘, 위 아래로 간격을 벌려 박혀 있다. 양쪽의 기둥은 원형이다. 기둥 윗 편 중앙에는 각재 횡목이 한가운데 파고들듯이 박혀 있고, 그 위에는 역시 각재 횡목이 옆으로 펼쳐져 있다. 이 두 각재 횡목은 ㅜ자 형상을 이루면서 2층 누마루의 아래 바닥판을 형성한다. 1층과 2층 사이의 기둥을 연결하는 것은 다 이러한 방식을 취하고 있다.


1층 영역의 서쪽 방향 두 간 부분에는 참나무 장작이 수북이 쌓여 있다. 부지런한 살림꾼이 이 집에 기거한다는 점을 알려 주는 증거라고 하겠다. 1층 영역의 서쪽 두간 부분은 흙벽이다. 대문 쪽 벽은 그대로 전체가 흙으로 되어 있고, 바깥쪽 벽은 흙벽의 정 중앙 부분쯤에 굴뚝 관이 박힌 구조물이 가설되어 있다. 이러한 형상이므로, 정면 1층 벽은 밖에서는 제대로 그 미학적 분위기를 감상하기 어렵다. 2층 영역은 이것과는 조금 상황이 다르다. 이 부분은 서쪽 4간과 동쪽 1간이 다른 방식으로 처리되어 있다.


2층 벽의 처리방식 속에는 조화와 변화의 미학이 어울려 있다. 아래 바닥판 위에 각재의 횡보를 일선으로 붙이고, 지붕 아래편에도 석가래 아래 각재 횡보 아래 또 하나의 각재를 붙여 일선으로 돌렸다. 벽면의 6분의 5부분 높이에는 또 각재의 횡보가 일선으로 뻗는다. 그러한 벽면 분할은 횡선이 강화되어 5간 2층의 누각건물이 납작하게 바닥 쪽으로 눌러 붙어 있는 듯한 안정감을 부여한다. 그러나 너무 눌러 붙어 있는 느낌만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은 곤란한 노릇이다. 각 벽면을 수선이 강화되는 방식으로 처리하고 있는 점이 이러한 느낌을 희석시켜서 균형감을 부여한다.
2층 벽의 서쪽 네 간은 똑같은 방식으로 처리하였다. 벽면의 아래쪽 6분의 5는 완전히 판재로 구성되어 있다. 중앙에는 두 쪽의 나무판 문, 그 좌우로는 두 쪽의 나무판이 수선방향으로 붙어 있다. 이 판재들에게서 나타나는 수선의 효과가 너무 강력하고, 또 단순하다. 그 점은 이 판재들을 연결하여 주는 가늘고 짧은 목재들이 만들어내는 횡선이 이 벽면에 자연스러운 리듬감을 부여한다. 나무벽의 두 쪽 판재들은 중앙 부위에 두 뼘 정도의 넓이를 두고 두 줄의 짧은 횡목이 붙어 있다. 위 쪽 끝에서 반 뼘 쯤 되는 높이에도 한 줄의 짧은 횡목이 붙어 있다. 나무판 문의 위와 아래에는 조금 굵은 횡목이 붙어서 벽면에 두 쪽 나무문을 고정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원형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자연목이다. 나무판 문도 아래위로 횡목이 붙어 있다. 나무판재를 고정하는 세 줄의 횡목과 나무판문을 고정하고 있는 두 줄의 횡목은 붙어 있는 높이가 조금씩 다르고 그 간격도 서로 다르다. 판재 면을 고정하기 위해 쓰여진 짧은 횡선의 각재들과 나무판 문을 고정하기 위해 쓰여진 조금 긴 횡선의 자연목은 길이와 굵기, 느낌이 또 서로 다르다. 단일성의 미학 속에서 차별성의 미학이 슬며시 드러나서, 전체의 미학에 은은한 생동감을 부여하는 것이다. 벽면의 위쪽 6분의 5 정도 되는 넓이는 흙으로 메워져있다. 판목의 벽면과 흙벽은 또 소재의 차이에서 오는 변화의 미학을 드러낸다. 이 좁은 벽면은 횡으로 5간 넓이로 펼쳐지므로 전체 벽면에서 횡선의 느낌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 점을 우려한 탓인지 이 벽면은 각 면마다 2개의 짧은 각재를 종으로 박아 넣어 중용의 미학을 추구한다. 서쪽 끝의 벽면 속에서는 3줄의 각재가 박아 넣어져 있는 것이 보인다. 이층 벽의 이 네 간은 누마루의 벽면을 구성한다. 
2층 벽의 동쪽 1간은 방의 벽면을 구성하고 있다. 이 부분은 기둥과 횡보, 벽면의 분할을 위해 쓰인 각재 외에는 벽면 전체를 흙으로 처리하였다. 아래쪽 6분의 5 넓이로 분할된 벽면 가운데에는 아래에 폭 좁은 판목을 붙이고 문지방을 가설한 위에 두 쪽의 격자무늬 방문을 붙였다. 이 벽면에는 아래로부터 솟구쳐 오른 원통 모양의 현대풍 프리스틱 굴뚝이 사선으로 처마 끝을 향해 가설되어 있는데, 이 점은 눈에 크게 거슬린다.
재사는 안내문에서 말하여지듯이 평면의 대좌 위에 건립된 것이다. 그런데 앞에 2층의 누마루를 두고 미음자 모양으로 지어졌다. 이것은 안쪽의 작은 사각형 뜰을 이용하고자 하는 의도를 갖는 것이고, 그렇다면 아래채와 윗 채의 건물은 같은 높이에 있어서는 안 된다. 건물이 산기슭을 벗어나 평지 쪽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완전히 수평의 평지는 아니다.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밋밋한 기울기를 가진 평지이다. 따라서 건물은 서로 다른 높이의 대좌를 쌓아올려 높이의 차이를 극복하여야 하였다. 측면에서 보면 이 점은 금방 눈에 들어온다.
동쪽의 측면에서 볼 때, 건물의 대좌는 계단식으로 점차 높아진다.  앞 쪽의 제 1칸은 석재를 3단으로 쌓아올린 제 1단의 대좌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제 1칸의 중앙 부분부터 제 2단의 대좌가 시작된다. 1단과 2단 사이의 높이 차이는 크게 나지 않는다. 작은 돌을 일단 높이로 쌓은 대좌이다. 제 2칸의 중간 부위에서는 제 2단의 대좌가 시작된다. 작은 돌을 3단 높이로 쌓은 대좌이다. 제 4칸의 중앙 부위에서는 역시 작은 돌을 3단 높이로 쌓아올린 제 4단의 대좌가 시작된다. 이런 대좌 높이의 차이와 바닥 면을 구성하는 밋밋한 기울기를 중첩적으로 이용하여 아랫 건물과 윗 건물의 높이 차이가 확보되는 것이다.


동쪽 측면의 벽면들은 흙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칸의 벽면구성 방식은 조금씩 다르다. 제 1칸은 1층부분은 통으로 흙벽이다. 2층 부분은 전면의 제 5칸 처리방식과 동일하다. 벽면은 위아래로 나뉘어 지며, 아래 쪽 넓은 부분에는 1쪽의 방문을 조금 벽면의 북쪽으로 치운친 지점에 달았다. 위쪽의 좁은 부분은 두 개의 각재 횡보에 의해 평행선으로 구분된다. 이 부분은 아래쪽 건물의 높이와 동쪽 건물이 이어지면서 중간 위쪽에서 두어 뼘쯤의 공간이 더 마련된다. 윗쪽 두 개의 횡보 에 의해 분할되는 벽면은 아래쪽은 긴 직사각형, 위쪽은 그 중간 부분부터 시작되는 사다리꼴로 서로 차이가 나는 것이다. 아래쪽 긴 직사각형은 정면처럼 각재를 수선으로 박아 분할하였는데, 중간에 하나 만을 배치하였다. 이 동쪽 벽면은 5칸이 다 벽면을 위아래 2단으로 분할하였다. 제 4칸과 제 5칸은 같은 높이에서 분할되지만, 다른 3칸은 분할 높이가 조금씩 다르다. 제 2칸은 제 1칸 보다 한 뼘쯤 높은 지점에서 분할된다. 제 3칸은 제 2칸 보다 다시 한 뼘쯤 높은 지점에서 분할되고, 제 4칸과 5칸은 제 3칸보다 한 뼘쯤 낮은 부분에서 분할된다. 위쪽 각재 횡보의 처리방식에서도 이러한 차이는 그대로 나타난다. 제 2칸의 위쪽 에는 처마 밑의 각재 아래쪽으로 제 1칸의 사다리꼴 벽면을 만들었던 위쪽 각재 횡보 보다 한 뼘 높은 지점에 각재 횡보가 위치한다. 이 횡보에 의해 벽면은 아래위로 5대 1 정도의 비례로 분할되고 넓은 벽면은 수선의 각재에 의해 종으로 3분되며, 그 중간 부분에 아래쪽으로 작은 창문이 내려 붙는다. 제 3칸은 1층 영역과 2층 영역으로 2분된다. 1층 영역은 중앙 부위에 2쪽의 나무판 문이 달렸다. 이것은 동쪽 건물채의 측문이다. 2층은 벽면이 종으로 3분된다. 벽면의 비례는 1대 3대 3 정도이다. 제 4칸은 1층 영역과 2층 영역의 비례가 2대 3 정도 되고, 2층 영역은 중앙의 횡보에 의해서 또 아래위로 3대 2 정도의 넓이로 분할되고, 중앙 벽면은 또 종으로 1대 3대 2 정도의 넓이로 분할되며, 그 가운데 부분에 격자무늬 방문 모양의 창이 옆으로 눕혀져 달려 있다. 제 5칸은 제 4킨과 비슷하다. 창문이 없는 것, 종으로 3분된 중간 칸의 넓이 비례가 2대 3대 1 정도의 넓이라는 것만이 차이가 날 따름이다. 동쪽에서 볼 때 재사의 지붕은 뒤편으로 삼각형의 윗 채 지붕이 솟아 있는 형상이다.




재사 북쪽 밖의 벽은 두 가지 방식으로 처리되어 있다. 동쪽 끝과 서쪽 끝 칸이 같은 방식이고, 가운데 세 칸이 또 같은 방식이다.
양 끝은 벽면이 횡으로 4단으로 분할되어 있다. 제일 아래쪽은 30센치 정도 높이인데, 기초부분이다. 여기에는 중앙에 굴뚝 구멍이 가설되었다. 아래에서 두 번째 칸은 기초부분의 약 3배 정도 넓이인데, 중간에 각재를 수선으로 박아 분할하였다. 아래에서 세 번째 칸은 기초부분과 비슷한 넓이인데, 각재를 두 개 수선으로 박아서 벽면을 3분하였다. 이 부분은 서쪽 끝칸에서는 수선 분할이 되어 있지 않다. 제일 윗칸은 중앙이 삼각형으로 흘러내리는 지붕의 사선과 만나므로 동쪽 끝 칸과 서쪽 끝칸이 서로 반대되는 모습의 사다리꼴 모습을 보여준다. 이 부분도 동쪽 끝 칸에서는 중앙에 각재를 수선으로 박아 분할하였고, 서쪽 끝 칸에서는 그냥 통으로 처리되어 있다. 이 두 벽면의 제 3면과 제일 윗면을 분할하는 각재 횡목은 가운데가 위로 굽은 모습이다. 이렇게  이 두면은 같은 방식으로, 그러나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처리되어 있는 것이다.
가운데 3칸은 벽면이 3단 분할되어 있다. 제일 아래쪽은 기초부분이다. 이 부분은 높이가 양쪽 두 칸의 기초부분과 같다. 이 부분의 중앙에는 원형의 구멍이 마련되어 있다. 마루의 아랫부분에 바람이 통하게 하는 구조물이라고 하겠다. 그 위쪽의 벽면은 아래 4, 위 3 정도의 넓이로 각재 횡목에 의해 분할되어 있다. 아랫단은 1대 2대 1 정도의 넓이로 수선으로 분할되었다.


가운데 부분에는 두 쪽의 나무판이 자리 잡고 있다. 윗단 역시 1대 2대 1 정도의 넓이로 각재를 수선으로 받아 분할하였다. 이 분할의 비례는 면마다 조금씩 다르다. 이 세 칸의 나무판 문이 있는 벽면 위쪽을 가르는 횡목은 양쪽 끝 면의 제 2단을 형성하는 횡목과 제 3단을 형성하는 횡목 사이의 높이에 올라붙어 있다. 이 높이의 차이와 중앙 세 면의 윗단을 분할하는 넓이의 차이가 이 북쪽 벽면의 단조로움을 깨트리는 역할을 수행한다.


북쪽 벽면이 차이보다는 같음이 강조되는 미학적 양상을 갖춘 것은, 건물 전체가 같은 평면 위에 올라앉아 있는 것과도 상관된다. 서쪽 건물채의 바깥에서는 북쪽 건물채에서 사라졌던 높이의 차이가 가장 심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차이의 미학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도 이 서쪽 건물채의 바깥벽에서이다. 동쪽 건물채에서는 기단면의 위아래 높이 차이가 바닥면의 기울기와 인공으로 쌓아올린 계단식 대좌에 의해 극복되었다. 여기 서쪽 건물채에서는 마당이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바닥의 기울기는 이용되지 않고, 인공으로 쌓은 대좌에 의해서만 기울기의 차이가 극복된다. 따라서 인공 대좌는 동쪽에서보다는 두 배는 높게 가설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도 인공 대좌는 계단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제일 북쪽의 제 5칸은 제일 높은 기단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칸은 제 1칸과 같이 다른 칸들보다 넓게 되어 있다. 제 5칸의 위쪽 지붕은 뒤쪽 건물채의 삼각형 지붕이 위쪽으로 솟아 있다. 제 5칸은 이 뒤쪽 건물채 영역 대부분을 점하고 있다. 이 제 5칸의 벽면은 3단으로 횡단 분할되어 있다. 아래로부터 2대 3대 1 정도의 넓이이다. 아래쪽 단과 위쪽 단은 통으로 흙벽이다. 가운데 칸은 두 개의 각재를 수선으로 박아 넣어 또 3단 분할을 하였다. 북쪽으로부터 1대 1대 3 정도의 넓이로 분할된다. 그 두 번째 부분은 또 다시 가운데 횡목을 두어 아래 1, 위 2 정도의 넓이로 분할하였고, 위쪽 부분의 뒤쪽 위편 구석으로는 사각의 작은 창을 두었다. 제 4칸 역시 두 개의 횡목을 가로질러 3단 분할을 하였다. 아래로부터 1.5대 2대 1.5 정도의 넓이로 벽면은 분할된다. 3단 분할을 하면서 벽면의 나뉜 비례가 다르고, 또 기단의 높이가 다르므로, 횡목이 놓여진 위치는 당연히 제 5칸과 제 4칸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제 5칸은 가장 높은 기단 위에 올라서 있고, 제 4칸은 그보다 조금 낮은 기단 위에 위치한다. 이 칸은 전체적인 넓이도 제 5칸에 비해서는 현격하게 좁다. 제4칸, 제3칸, 제 2칸이 같은 넓이이고, 제 1칸은 제 5칸과 같은 넓이라고 할 수 있다. 제 4칸의 중앙 부분은 다시 두 개의 각목을 수선 방향으로 박아 넣어 같은 비례로 3분되고, 중앙 부분에는 작은 사각형의 창을 두었다. 창은 중앙부분의 위쪽으로 올라붙어 있고, 아래쪽에는 한 뼘쯤의 흙벽이 그대로 남겨져 있다. 제 3칸은 제 4칸 보다 또 조금 더 낮은 기단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벽면 역시 다른 벽면들과 서로 다른 높이로 가설된 횡목에 의하여 3분된다. 아래로부터 1대 2.5대 2.5 정도 되는 분할이다.




가운데 부분의 남쪽 아래편 구석에는 아주 작은 사각형 창이 마련되어 있다. 안에 부엌이 있으므로 이 사각형 구조물은 창문 역할과 환기구 역할을 위해 만들어진 것일 테지만, 지금은 흰 종이로 발라 막아놓고 있다. 제 2칸은 제3칸 보다 또 한층 낮은 기단 위에 자리 잡는다. 이 벽면은 횡목에 의해 반분된다. 그 아래편 벽면에는 측문이 가설되어 있다. 벽면은 수직으로 3분된다. 1대 2대 1 정도의 넓이이다. 가운데에는 두 쪽의 나무문이 달려 있다. 위편으로 손바닥 하나 넓이의 사각형 공간이 마련되어 있는 문인데, 이것 역시 환기를 목적으로 하는 것일 터이다. 이 벽면의 위편 역시 수직으로 3분된다. 이 벽면의 위편 아래쪽으로는 여러 개의 원형 목재가 박혀 있다. 안쪽 부엌의 다락 바닥을 구성하고 있는 나무들이다. 수직으로 분할된 이 벽면의 비례는 2대 1대 2 정도의 넓이이다. 옆의 마당에서는 이 칸의 측문으로 들어서는 4단의 계단이 마련되어 있다. 제 1칸은 이 계단의 제 3단 정도 높이의 기단 위에 올라서 있다. 이 칸의 벽은 횡으로 4분된다. 아래쪽 단은 흙벽인데, 누각건물의 1층 영역을 이룬다. 2층 영역의 벽면은 횡으로 3분 된다. 4대 1대 1 정도 되는 비례의 분할이다. 맨 아래, 넓은 부분은 중앙에 두 쪽 나무판 문을 단 나무판 벽이다. 가운데 부분은 짧은 각재를 셋 수선으로 박아 넣어 4 분한 흙벽이다. 이 부분의 위쪽 횡보는 시옷자 형상으로 휘어져 있다. 그 시옷자 형상의 가운데 부분에는 위로 짧은 기둥을 세웠다. 이 기둥에 의해 그 위쪽 벽면은 좌우로 2분된다.



안에서 본 서지재사
서지재사 안으로 들어가려면 서쪽 채의 제 2칸에 마련된 측문을 이용하여야 한다. 주로 이용하는 것이 이 문이다.
측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부엌 칸이다. 부엌 칸은 사방이 1칸 크기인데, 측문과 반대 방향으로는 벽면이 통째로 열려 안마당으로 통하고 있다. 남쪽의 벽면에는 아래쪽으로 광으로 통하는 작은 문이 달려 있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광이다. 누각 영역의 서쪽 끝 1층이 바로 이 광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 달려있는 작은 문은 통나무를 거칠게 찍어내어 만든 두 쪽의 두터운 판재이다. 투박하고 거칠지만, 따뜻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문이다.


문의 위쪽 벽은 지붕 밑 서까래에 이르도록 통으로 열려 있다. 광 문의 위쪽은 선반이고, 선반 위쪽으로 공간은 횡으로 2분되며, 횡으로 나누어진 각 공간은 또 종으로 3분된다. 부엌 영역은 남쪽 반절쯤은 통으로 열려 있고, 북쪽 반간쯤은 위에 다락이 가설되어 있다. 북쪽 영역의 끝에는 두 개의 아궁이가 있고, 위 쪽 벽면은 그을음이 짙게 묻어있다. 아궁이는 하나는 솥 올리는 구멍이 없고, 다른 하나에는 중간 크기의 양은솥이 올려져 있다. 부엌의 안마당 쪽 벽은 위 반 절쯤이 비워져 있다. 그 위로는 다락이 가설되어 있다. 
서지재사 2층 누마루는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이다. 동쪽 끝은 동쪽 채의 방이다. 서쪽 끝 칸에서 북쪽을 향해 서면 서쪽 채의 건물 벽이 보인다.




2층 누마루는 낮고 아담하다. 천장은 시옷 자 형상으로 늘어선 서까래들로 이루어져 있다. 바닥은 중앙에 동서방향으로 뻗은 판목을 두고 양쪽으로 남북방향의 판목을 깔은 2단 마루이다. 남쪽 방향에 늘어선 기둥은 원형이고, 북쪽 방향에 늘어선 기둥은 각재이다. 서쪽으로부터 첫 번째 두 번째 각형기둥은 서쪽 건물채의 벽면을 구성하고 있는데, 그 두 번째 각형기둥에는 남쪽 방향에 작은 원형기둥이 덧대어져 있다. 바닥마루는 각형 기둥 밖의 안마당 쪽으로 3줄의 쪽마루를 동서 방향으로 깔았다. 마루 끝, 안마당 쪽으로는 난간이 가설되어 있다. 각재로 틀을 만들고, 안에 판재를 끼운 구조이다. 판재는 30센치 정도의 높이이다. 판재의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안상이 하나씩 만들어져 있다. 구멍사이에 주먹 하나가 들어갈 만한 크기의 안상이다. 난간 위쪽은 두툼한 각재인데, 매끈하게 처리된 것이 아니라 투박한 모습이다. 부엌 광의 문짝을 처리한 미학이 여기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게으른 목수가 대충 자귀로 다듬은 후에 그냥 올려 앉힌 것만 같은 느낌이다. 누마루로는 서쪽 건물채의 측문에서 안마당 영역으로 들어와 광 옆의 벽면을 타고 가설된 나무계단을 통해 오를 수 있다. 계단의 반대쪽으로는 안마당의 서쪽을 타고 좁은 뜨락길이 마련되어 있고, 있어서, 북쪽 건물채의 마루로 오를 수 있다. 누마루의 아래층은 안마당 쪽으로 터진 허당이다.



북쪽 건물채는 양쪽에 한 칸 크기의 방을 갖춘 3칸 규모의 마루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루에서 보았을 때 동쪽 방의 벽면은 횡으로 2단으로 분할되어 있다. 아래 4, 위 1 정도의 비례이다. 아래쪽은 또 4단 분할되어 있다. 북쪽 끝단은 위로 난간이 가설되어 있다. 나머지 3단 중 가운데에는 작은 방문이 달려 있다. 아래 4, 위 1 정도의 비례로 횡단 되어 있는 평면 분할은 이 북쪽 건물채 마루를 둘러싸고 있는 벽면들에서 동일하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마루영역의 아래쪽 벽면에는 각 칸마다 두 쪽의 나무판 문이 가설되어 있고, 벽면을 분할하는 횡목에는 선반이 매어져 있다. 위쪽의 벽면은 수선의 각재로 3분된다.


북쪽 건물채의 마루는 동쪽 건물채 안쪽으로까지 쪽마루를 깔고 돌아간다. 이 쪽마루 끝에도 난간이 세워져 있다. 이 쪽마루는 동쪽채의 아래로부터 3번째 칸까지 이어진다. 동쪽 건물채의 아래로부터 2번째 칸까지에는 누각 마루가 쪽마루 형식으로 뻗어나가 있다. 누각에서 뻗어 나온 마루와 안채에서 뻗어 나온 마루는 높이가 서로 다르다. 안채 쪽의 마루가 한 뼘 쯤은 높은 것이다. 이 단층은 해소되지 않고 서로 계단처럼 만나는 것으로 처리되어 있다.


안마당에서 보면 북쪽 건물채는 높다랗게 올려다 보인다. 안마당 한가운데 서서 북쪽 건물채의 마루 위를 올려다보는 시선방향은 서지재사에서 가장 매력적인 미학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높이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북쪽 건물채는 높은 대좌를 마련하여 올라앉았다. 북쪽 건물채의 대좌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3줄씩 2단으로 쌓아올려 마련하였다. 그 사이에는 좁직한 뜨락이 있다. 2단의 축담 한가운데에는 계단이 있다. 5단의 계단을 오르면 북쪽 건물채의 위쪽 뜨락이다. 뜨락 위로는 마루의 바닥 일부와 끝의 각재, 그리고 마루 끝 선 너머로 물러나 앉은 벽면의 윗부분이 보인다. 벽면 위쪽으로는 뒤쪽으로 내려앉는 사선의 서까래가 있고, 그 앞쪽으로 올라앉은 들보가 있고, 또 그 앞쪽에서 이번에는 사선으로 올라붙은 안채 이쪽 천정의 서까래가 있다. 이쪽 서까래와 저쪽 서까래는 조금씩 휘어진 직선의 자연스러운 어울림을 보여준다. 이 쪽 서까래 끝의 옆면 원형들이 늘어서 있는 위편으로는 기왓골의 끝선이 흔들리듯이 옆으로 펼쳐져 있다. 그렇게 거기 안마당의 중간에 서서 북쪽을 향하면 서지재사 안채의 목재와 흙벽, 직선과 곡선, 조금씩 다른 모습을 갖춘 비슷한 모양의 평면들, 그 조금씩 같으면서 조금씩 다른 선과 면들이 한데 어울려 시선 안으로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 흥미롭다.




학봉 김성일의 묘소
서지재사에는 현판이 없다.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다른 곳에 보관하여 둔 것일까? 만약에 원래는 있는 것이라면, 모사를 해서라도 걸어 놓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재사에서 서쪽으로 50미터 정도. 마을 뒤편 산기슭에는 비각이 있다. 학봉 김성일의 신도비각이다. 비각 앞에 서 있는 안내판을 보자.  


학봉 신도비 및 묘방석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12호
안동시 와룡동 서지리


이것은 학봉 김성일의 신도비와 묘방석으로, 신도비는 묘소의 5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고, 묘방삭은 묘소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김성일은 류성룡과 더불어 퇴계학파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그의 학통은 장흥효張興孝, 김흥락金興洛으로 이어지면서 한말까지 영남학파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신도비는 화강암을 거북모양으로 조각하여 만든 귀부에 역시 화강암의 비신을 세웠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213센치, 너비 108센치, 두께 37센치이며, 용모양의 비머리는 높이 80센치로 두 마리의 용무늬와 구름무늬를 새겼다. 비신의 용모양의 비머리는 동일한 석재로 만들어진 것이 특징이다. 묘방석은 무덤을 조성할 때 나온 큰 바위로서 흔치 않은 특이한 형태로 묘비를 대신하고 있다.
경사진 기슭을 걸어 올라가면 바로 학봉 김성일의 묘소이다. 묘소 동편 옆으로 물러서 앉아 있는 묘방석이 가장 먼저 눈길을 끈다.


김성일 : 중종 33년 무술(1538)- (선조 26년 계사(1593), 향년 56세. 자 사순士純, 호 학봉鶴峯. 청계靑溪 김진金璡의 4자.
공의 묘소는 와룡면 서지동 서지동西枝洞 선영 아래에 있다. 공은 임진왜란 때 경상좌도 순찰사로 진주성을 지키면서 왜적과 대적하는 한편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을 구휼하는데 밤 낮을 가리지 않고 몸소 돌보다가 역질로 산조 26년, 계사년 4월 29일 진주성에서 병사하였다. 난중이라 즉시 환구하지 못하고 지리산록에 가장 하였다가 11월, 장자 집潗이 반구하여 그 해 12월에 가수천嘉樹川에 감좌坎坐로 안장하였다. 세간의 전설에 의하면 이곳은 금계포란金鷄抱卵 형국의 명당이라 하는데 광중壙中에 바위가 있어 와룡의 생기를 모으고 있었는데, 천광淺壙이라 하여 그 바위를 드러내고 묘를 썼음으로 발복을 후손이 받지 못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묘 옆의 큰 돌이 그 때 그 바위이며, 당시 안동부사 정구鄭逑의 제문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묘 전에는 숙종 병진丙辰년(숙종2년, 1676년)에 증직으로 이조판서에 가질되고 문충文忠이라 시호가 하사된 전말의 기록을 순조 13년 계유년(1813년)에 귀와龜窩 김굉이 서술한 비가 있다. 묘 아래의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찬의 신도비는 현종 5년(1664년)에 건립되었는데, 이산뢰李山賚 서에 김상용金尙容 전篆으로 증이조참판학봉김선생신도비 贈吏曹參判鶴峯金先生神道碑라 쓰여져 있다. 뒤에 여강盧江서원, 사빈泗濱서원, 임천臨川서원에 제향되었다.
   
향토사학자 서주석씨의 기록이다. 위의 기록에 의하면 여기 묘방석은 금계포란의 명당 안에 들어앉아 와룡의 온갖 생기를 모아들이고 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범상치 않은 물건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그런 풍수적 설명보다 이 묘방석은 더욱 매력적이다. 둥글게 생긴 그 모양새 부터가 매력적이고, 이 돌을 깨기 위해 일선으로 만들어 놓은 일곱 개의 구멍이 또 매력적이고, 깨려고 하던 돌을 그냥 옆에 세우고 그 위에 글자를 새기는 선택을 할 수 있었던 당시 사람들의 미학적 선택이 또한 매력적이다.




묘방석 표면을 덮고 있는 글씨들은 크고 대범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명나라 조선 학봉 김선생 사순의 묘
사순은 휘가 성일이다. 가계는 문소에서 시작되었다. 무술년에 낳아서 계사년에 죽었다. 무진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임진년에 본 도에 부임하였다. 사신을 모시고 일본에 갔을 때에는 흔들림 없이 정직하게 처신하여 임금의 영명한 이름을 멀리까지 떨쳤고, 명을 받들어 초유사로 활동할 때에는 모두가 감동할 정도로 지성으로 일하여 한 지방을 안정시켰다. 충성은 사직을 존속시켰고, 이름은 죽백에 새겨졌다. 일찍이 퇴계 이선생의  문하에 들어 심학의 요체를 전해 들어서 덕행과 훈업이 족히 백세에 밝게 드날릴 정도가 되었다.
만력 기미년 여름, 한강寒岡 정구 적음.
(선생의 장례 때 광중에서 기이한 바위가 나왔는데 모양이 큰 북과 같았고, 표면이 매끄럽고 고와서 글씨를 새길 만 하였다. 묘의 좌측에 옮겨 세우고 선생 행적의 대략을 새겨 넣으니, 실로 정 한강이 쓴 글이다. 돌이 땅 속에 숨어 있은 지 몇 겁의 세월이 흘렀을 텐데 선생의 의관을 묻을 때에 바로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 그 실기를 적는 것으로 쓰여지니 조물자의 뜻이 반드시 기획한 바가 있는 것이라 하겠다. 오호! 기이한 일이도다. 홍문관 교리 이준경李埈敬 씀.)




명나라 조선. 눈에 거슬리는 표현이다. 조일전쟁의 와중이었기 때문에 이런 선택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하겠다. 비석은 새로 지은 것이다. 그 사정은 다음과 같다. 


묘갈명
선생의 장례를 치른 것은 만력 계사년 12월 경신일이다. 27년 후 기미년에 비갈을 세웠다. 그 후 57년 되는 병진년에 선생에게는 자헌대부 이조판서가 증직으로 주어졌고, 그로부터 3년 후인 기미년에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러므로 증직이 내려진 것이나 시호가 주어진 것은 비갈에 쓰여지지 못하였으므로, 당시에부터 이미 비갈을 바꿔 세우는 것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경황이 없어 미적거리다가 수 백년의 세월이 흘렀다. 경오년에 이르러서야 사손인 현감공 종수宗壽가 여러 친족, 주변 선비들과 더불어 상의해서 개갈을 하기로 결정하고 그 전말을 한 마디 적어 달라고 청하여 왔다. 아는 것도 없는 까마득한 후생으로 비록 몇 줄에 불과하지만 어찌 감히 선생의 묘갈에 먹물을 묻힐 수 있을 것인가.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참람되게 삼가 다음과 같이 써서 갈명으로 덧붙이고자 한다. 갈명은 이러하다. 선생의 사업과 훈명은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이미 뚜렷하네. 선생의 도덕과 문장도 말로 그려낼 수 있는 것이 아니네. 돕고 허락하고 기대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중망을 받은 점은 사문에 정평이 있었던 것이고, 스승의 연원을 주고받은 실질은 한짝 병풍 글씨로 살펴볼 수 있으랴. 앞선 성인이 되고 뒤따르는 성인이 됨에 어찌 다른 비술이 있겠는가. 백가지의 연원이 되고 백가지를 갖춰 같게 되는 것만이 한 가지 법식일세. 강직한 도리로 외로이 충성의 실질을 다하였고, 임금을 신처럼 받들어 의심함이 없었네. 유문의 종통을 이어받으니 백세가 흐르더라도 흐트러지지 않으리라. 성명한 조정의 은전이 거듭 덧붙여지고, 반듯한 바위에 새긴 글을 따라서 바꾸는 일은 실로 오로지 군자가 받아 갖춘 것 때문일 뿐이네. 동에서 서에서 그 아래를 지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서 우러러 그 모습을 그려보며 떨치고 일어서지 않을 수 있으리요.
13년 전 계유년 여름에 일족의 후손 가선대부 행 용양위 호군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 김굉 은 삼가 쓰다.


서지재사는 바로 이 학봉 김성일의 묘사를 받들기 위한 것이다. 400년 이상 묘소는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재사는 200년 이상 묘사를 받들어 온 것이라고 하겠다. 지금 재사는 묘사를 모시는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 시대는 그렇게 변화해 가고 있는 것이다. <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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