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나서는 사람들 40년간 배웅한, 길안정류장 전두만 임금유 부부(글/이미홍-객원기자)

길 나서는 사람들 40년간 배웅한 길안정류장 전두만 임금유 부부


계절은 늘 우리를 앞서간다. 봄인가 싶으면 어느새 여름의 문턱에 와 있고, 이제 여름이구나 싶어 주위를 둘러보면 어느새 폭염의 한복판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번 여름은 특히 더 그랬다. 장맛비가 줄기차게도 내려 지겨움을 넘어 무섬증까지 들 무렵 문득 쨍 하고 해 뜨는 하루가 시작 되는가 했는데, 이번에는 모든 생물들을 헉헉거리게 하는 뜨거운 날들이 내리 이어지고 있었다. 아마도 어느 날 아침 눈을 뜨면 이 무더위도 거짓말처럼 그렇게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고 가을이 되어 있을 것이다. 감히 자연을 정복하였노라 자신하는 인간은 오늘도 그렇게 매순간 앞서가는 자연을  쳇바퀴처럼 따라 돌며 살아가고 있을 뿐은 아닐까? 꽃을 피우면 꽃 따라 몰려다니고, 바다가 부르면 바다로 가고, 단풍 든 산이 부르면 그 산을 오르고, 눈을 뿌리면 눈밭을 뒹굴고 하면서, 그러면서 인간은 자신들이 자연을 즐긴다고 착각하며 사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어느 한 순간 인간의 오만함을 심판이라도 하듯이 천재지변이라는 이름의 괴물 같은 자연을 만나게 될 때에야 인간은 한 번씩 작아진다. 이번 여름 나는 그렇게 한껏 작아진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내가 사람임을 느끼게 해 줄 사람냄새 물씬 나는 우리 이웃을 만나기 위해서.


사라져가는 옛것들 속, 길안정류장의 명물부부
많은 것이 우리 곁에서 사라져 간다. 개천 둑길도 사라지고 비가 오면 흙탕물을 튀기던 흙길도 사라지고, 시골 마을의 작은 소학교들도 사라져가고, 버스 안내양도, 차표 팔던 아가씨도 하나 둘 우리 주위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모르는 사이 소도시의 작은 읍내 버스터미널들도 하나 둘씩 사라져 가고 있다. 이미 많은 버스정류장들이 문을 닫았고, 사람들은 터미널 대신 길거리에서 버스를 기다려 타는 일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 불편하지만 어느새 그 또한 일상이 되어간다. 그런데 길안에 가면 다르다. 길안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어엿한 버스터미널이 있다. 그리고 그 곳에는 버스터미널을 지키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다. 
길안 버스터미널의 전두만 할아버지(77)와 임금유 할머니(75)는 젊은 시절부터 잉꼬부부라고 길안 읍내에 소문이 났다. 버스터미널이 문을 연 이래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부부가 늘 같이 나와 버스터미널을 지켰기 때문이다. 


길안 버스터미널의 역사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인생 역정과 겹쳐져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인가를 받아서 길안 버스터미널을 지어 운영해 온 주인공들이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젊었을 적 공무원 시험을 쳐서 합격이 돼서 길안 소재지에서 동서기를 9년을 했다고 한다. 그때도 일본에서 자라서 한국말도 서툴고 한문도 잘 모르고 해서 2년 동안 한문 공부를 하고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해서 합격을 한 거란다. 그런데 요즘은 들어가기도 어려운 철밥통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버스정류장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공무원 월급보다 정류장을 하는 게 돈벌이가 더 좋았기 때문이었는데, 거기에는 처남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우리 처남이 버스 회사를 했는데, 그때는 버스 사업이 한참 잘되고 있었던 때라 처남이 자기 따라 다니면서 일도 도와주고 한국 물정도 좀 배우라고 해서 한 서너 달 따라 다녔지. 그러다가 처남이 버스정류장을 한 번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하더라고. 그래 여기서 버스정류소를 시작하게 된 게 오늘날까지 이래 이어 온 거래.”
할아버지 말에 옆에 있던 할머니가 한마디 거든다. “요새 생각하면 그때 버스정류소를 하지 말고 대처에 나가 살았으면 애들도 여서 농사짓느라 그 고생 안 시키고 훨씬 더 나았을 긴데 싶은 생각도 들지만 그때는 이럴 줄 어데 알았나 뭐. 그러이 지난 세월 원망한들 어쩌겠어. 사람들은 우리보고 여 길안서 제일 부자라고 그러지만 촌에서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큰 고생은 안하지만 그렇다고 큰돈도 없어. 옛날에 한참 터미널이 잘 될 때는 하루 종일 사람들이 들락날락 북적거렸지만 그것도 다 한 때고, 벌써 오래 전부터 터미널 사업은 적자라.  고생만 하고 큰돈은 안 되고. 우리야 다 늙은 노인네니까 이러고 있지만 자식들은 다 그만두라고 난리지.”




현해탄을 건너와 연을 맺고 길안정류장에 정착
할아버지는 아버지 어머니 따라 일본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소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한국으로 나왔다. 형은 그때 이미 직장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 남았다. 그는 아버지 어머니 고향인 길안으로 왔다. 그리고 길안에서 할머니를 만났다. 첫눈에 마음에 들어 결혼을 했다. 형님이 있는 일본에 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할머니 때문에 포기를 하고 길안에 눌러 앉았다. 첫애를 놓고 나서 일본에 있는 형님으로부터 일본으로 들어오라는 초청장이 왔다. 그는 일본으로 가고 싶었다. 그러나 첫애를 갓 출산한 부인은 절대 남편을 보낼 수 없었다.
“요새 젊은 여자들은 남편이 오입 한 번만 해도 이혼하고 그러지만 옛날 우리네야 어리숙해서 어디 그랬나? 근데 우리 친정 어매가 전서방 혼자 보내면 절대 안 된다고 못 가게 했지. 남자들은 열이면 열 혼자 객지에 나가 있으면 딴 여자 본다고, 아를 업고서라도 같이 따라가려면 몰라도 혼자서는 못 가게 하라고 그러고, 나도 떨어져 혼자서 애 키우며 못산다고 붙잡았지.”
“우리 할망구 만날라고 내가 일본에서 나왔던 거 같애. 우리 할멈이 내 만나서 젊었을 때는 고생도 많이 했지. 저 위쪽에서 처음에 정류소 할 때는 시외버스 막차 기사들이 자고 다음 날 첫차로 가고 했는데 혼자서 일일이 그 기사들 밥 다 해주고 빨래해 주고 하느라 그때 고생 참 많이 했어. 그때 할멈하고 둘이 고생해가며 돈을 모아서 버스터미널법이 생겼을 때 이 아래 쪽에 밭을 사서 지금 자리에 주차장 시설을 하고 터미널을 넓혀서 왔지.“
할아버지가 슬쩍 할머니에 대한 고마움을 털어 놓는다. 그렇잖아도 동네에서 버스터미널 할아버지 할머니 잉꼬부부라고 소문이 났다더니 빈 말이 아니었다. 할아버지 한 마디 하시고 할머니 한 마디 하시고 하는 식으로 이야기도 주거니 받거니 하시더니만 할아버지 말씀을 듣기라도 한 듯이, “우리 영감이 시골 사람들 생각을 얼마나 한다고. 안동병원 앞에 정차하는 것도 아무도 신경 안 쓰는 걸 여기저기 건의서 넣고, 우리야 이제 나이도 들고 고마 치워버리만 되지만 여기 사람들 불편해서 어쩌느냐고 내내 그 걱정이고. 참말로 다른 사람들 생각 많이 해요. 몇 년 전에 내가 연탄가스 사고 크게 나서 우리 영감이 걱정 많이 했지. 다행히 서울 가서 큰 수술하고 이래 살았지만 그때 한 몇 달 동안 우리 영감이 생고생 했지 뭐. 


 




매사 깍듯한 성격, 아직도 간직한 꿈은 있지
일본에서의 규칙적인 생활 덕분에 몸에 밴 정리정돈 습관은 여기저기 그 흔적을 나타내고 있었다. 버스 시간표 옆에는 연결되는 노선의 다음 행선지와 갈아타는 곳과 시간 등 고객들에게 필요한 정보들이 빼곡히 메모되어 있었고, 그뿐만 아니라 온 방 안이 정리함이었다. 한쪽에는 열쇠가 고리에 매어져 용도별로 매달려 있고, 각종 문구들이며 담배 매입 등 각종 영수증이며 잡지며 비상연락처며 일일이 메모와 함께 일렬로 정렬이 되어 있는 식이었다. 각종 메모가 정리된 벽을 따라 시선을 이동하다 보니 낯익은 병원 이름들과 진료 시간표가 있다. ‘김재왕내과 수요일 오후 진료안함’ 하는 식으로 꼼꼼히 기록이 되어 있고, 급한 환자를 대비해 응급실 전화번호도 메모가 되어 있다. 우선은 자신들도 노인들이기 때문에 아플 때를 대비한 것이기도 하지만, 시골이고 노인들이 많은 농촌이라 언제 급한 환자가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적어 놓았다고 한다. 가끔은 아픈 환자를 대신해 전화로 예약도 해 주고 병원 진료 시간도 알려주는 건 물론이다. 그 많은 메모들과 버스 노선도와 시간표등에 적힌 깨알 같은 글씨들이 모두 할아버지가 일일이 손으로 썼다고 한다. 정자로 또박또박 쓰인 글씨들이 할아버지의 꼼꼼한 성격을 말해주는 듯하다. 


일어에 자신이 있는 할아버지는 큰 학원은 아니더라도 조그마한 교습소라도 차려서 일어를 가르치고 싶다고 했다. 언젠가는 일어를 가르치려고 할아버지는 나름대로 준비도 많이 해 놓은 눈치다. 오래 전부터 일어 가르치는 학원을 하고 싶어 하는 걸, 다 늦게 무슨 일을 새로 시작하느냐고 할머니가 말렸단다. 그런데도 할아버지는 미련을 못 버린 모양이다. 정성스럽게 만들어 놓은 히라가나 교본이며 일어 교본 해석해 놓은 것이 시쳇말로 장난이 아니다 싶게 꼼꼼하게 정리가 돼 있다. 그리고 말이 녹슬까 봐 수시로 말하고 읽고 해석하는 공부를 잠시도 게을리 하지 않고 열심히 해 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일본말이 능숙하기도 했지만 교본 해석도 내용을 외우다시피 줄줄 꾀고 있었다.


 




북적거리던 길안 풍경, 다 옛날 얘기지
할머니는 버스터미널 문을 닫을 지경이 된 건 모두 자가용 때문이라고 했다.
“요새는 다들 자가용 타고 다니니까 버스는 점점 더 안 되지 뭐. 우리 집만 해도 애들마다 차가 있어서 차가 다섯 대나 돼. 한 집에 자가용이 식구 수대로 서너 대씩 되니 우리네 같이 버스로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은 앞으로 자동적으로 문 닫게 돼 있지 뭐. 이제는 할아버지도 나도 나이가 들어서 겨울에는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도 힘들어. 날은 춥지, 손님은 없지, 그래도 첫차 들어오는 시간이 있으니까 여섯 시만 넘으면 문 열어야 되니까 할 수 없이 일어나는 거지. 두 노인네가 이렇게 하루 종일 자리를 지키고 있어도 요새는 하루 벌이가 5만원도 안 돼. 1, 2만원 벌 때도 수태. 담배도 안 돼. 요새는 담배포를 요기 내 주고 또 그 옆에 내 주고 그러이 담배가 되나. 옛날에는 거리 제한이 있었지만 요새는 그런 거가 어딨노? 이 좁은 길안 읍내에 담배포가 서너 곳이 넘으이 요새는 암 것도 안 돼. 옛날에는 담배포만 있어도 산다 그랬지만 요새는 이거도 안 되고 저거도 안 되고 그저 때려 치워야지 뭐. 매일 둘이 이래 같이 있지. 우리가 근무하는 시간을 따져 보이 딴 사람 배를 근무를 하는 셈이라꼬. 아침 여섯 시 조금 넘어서부터 저녁 막차 보내고 나면 아홉 시 가까이 되거든. 둘이 그렇게 종일 붙어 있어야 되는데 벌이랄 것도 없지 뭐.”
할아버지는 정부 정책에 문제가 있다고 했다. 꼭 부탁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내가 부탁하고 싶은 것은 다른 게 아니고 국가에서 터미널법을 만들어 공포되고부터 시설 기준에 의해 버스터미널 인가를 내 준 건데, 그 후에 시외버스 기준을 시에서 4킬로로 했다 8킬로로 했다 12키로까지 연장을 해 줘 버리니, 시외버스가 다 죽어버려서 차츰 자취를 감추게 되니까 운영이 점점 어려워진다는 거 하고, 그 후에 또 시군 통합이 돼서 시내까지 다 기본요금이 돼 버리니까 터미널 하는 사람들은 경영이 더 안 된다는 거지. 그리고 또 장거리 버스가 많이 다니면 그나마 경영이 되지만 지금은 금아고속에서 울산에서 안동까지 하루 12회 다니는 게 있고, 의성까지 가는 게 있지만, 의성까지는 시내버스도 다니니까 더 비싼 시외버스를 탈 일이 없지 뭐. 길안을 거쳐 가던 안동 대구간 직행 코스도 없어지고 하나 둘 노선이 없어지는 추세여서, 이런 소도시를 거쳐 가는 시외버스 노선은 이제 수명이 얼마 안 남았다고 봐야지. 자가용이 없는 이들도 요새는 장거리를 가려면 안동이나 의성으로 나가서 편리한 무정차 버스를 이용하지 국도를 이용하는 장거리 버스는 안타거든.”



살기 좋아진 시절이지만, 뭐든 예전같지 않아
할아버지의 말마따나 시대도 변하고 사람들도 따라 다 변했다.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너무 실제 보다 부풀려 살고들 있는 거라. 집집마다 자가용이고 버스도 고급만 타려고 하고. 구불구불한 지방도보다 고속도로 타려 하고. 그러니 정부 정책도 차 가진 사람 위주로 하고 도시 사람 위주로 가는 게 당연하고. 우리 같은 농촌 사람들에 대한 배려는 점점 없어져 가는 거지. 젊은 사람들이야 상관없지. 그런데 노인들이 문제라고. 젊은 사람들은 차도 있고 버스를 타도 바쁘거나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면 좌석버스 타고 나가지만, 노인들은 편하게 앉아 갈 수 있다고 해도 시내버스보다 비싼 좌석버스 안타거든. 그런 사람들 때문이라도 우리도 이거 계속하고 싶어도, 원체 경영이 어려우니까 그만두려는 거지. 우리 같은 지역에 있는 버스 터미널을 유지시키려면 버스 요금이 거리에 따라 조정하는 식으로 현실화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도 어려우니까 우리는 죽을 지경이라.”  
할아버지는 길안 버스터미널이 문을 닫더라도 길안 사람들이 버스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싶어서 정부에 건의하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내가 이 앞에 도지사 앞으로 건의서를 몇 번이나 냈다고. 버스 요금을 현실화 하는 것에 대해서도 도의원에게 몇 차례나 진정을 했고, 농촌에 노인 인구들이 많은 데, 노인들이 갑자기 아파서 안동에 있는 병원에라도 가게 되면 시외버스를 타고 가는 경우가 있는데 대부분 차들이 안동대학 앞에 한 번 서고 그 다음에 용상아파트 앞에 한 번 서고 그러고는 역까지 간다고. 그러니 아픈 노인들이 다시 택시를 타고 안동병원까지 와야 되는 거라. 그래 이왕 통과하는 구간인데 다른 덴 몰라도 안동병원 앞에 정차를 할 수 있도록 몇 차례나 건의를 했다고. 그런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지 아직까지 안 되고 있다꼬.”
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낸다. 옆에서 할머니도 “우리 영감이 주민들 도장까지 다 받아서 건의를 해서 이번에는 꼭 될 줄 알았더니만 안 되더라꼬.”하며 맞장구를 친다.


가끔은 젊은 날의 추억과 사람을 되짚어보지
얼마 전에 일본 가서 학교 때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가 자기가 일하는 곳을 보여 주겠다고 해서 따라갔더니 그 친구가 그 곳 사장이었다고 한다. 직원들과 똑같이 작업복을 입고 있어서 처음에는 사장인 줄 몰랐는데 직원들에게 마이크로 지시를 하는 것을 듣고 알았다고 했다. 그 친구하고 옛날 얘기를 하며 실컷 웃었다고 했다. 그리고 고베에 있는 소학교엘 찾아갔더니 그 학교 교감이 한국인 중에서는 유일하게 모교를 방문한 것이라고 하며 아주 고마워하더라고 했다. 할아버지와 함께 그 학교를 다녔던 그 많았던 한국인 친구들도 학창 시절이 그립긴 마찬가지일 테지만 아무도 할아버지처럼 그 학교를 찾아가지는 않았나보다. 그런 점에서 할아버지는 참 솔직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은사님도 만났단다. “우리 선생님이 검정고시로 합격을 해서 우리보다 겨우 두 살이 많은 젊은 선생님이었는데, 우리를 친구처럼 대해주고 아주 열정적으로 가르쳤다고. 그 선생님한테 영향을 많이 받고 따랐는데, 마침 주소를 알아서 편지 왕래를 하다가 올 3월 동창회 모임이 있다고 해서 일본에 가서 친구들도 만나고 오랜만에 선생님도 만났지.”
일본에 갔던 이야기를 하는 할아버지의 얼굴에 교정에서 친구들과 뛰놀던 그 시절이 그리운 듯 향수가 어린다. 학창 시절에 대한 추억이 있는 곳, 그곳이 일본이건 어디건 그게 중요한 건 아닐 거다. 그럼에도 일본에서 살았던 이야기를 하는 할아버지의 어투는 조심스러워 보였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어떻든 일본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복잡한 심사가 어떻든 세상을 거지반 산 할아버지는 그냥  그 시절이 그리운 것뿐인데 말이다.




비 피할 데라도 있어야 된다꼬,
사람들이 길안정류장이 없어지면 안된다케
이야기 도중에 물건을 대어주는 아저씨가 왔다. 냉장고 열어보곤 말도 없이 빠진 물건부터 채워 넣는 걸 보고 할머니가 손사래를 친다.
“아구, 아저씨야, 그거 넣어 봐도 안 된다. 지난번에 들여 놓은 것도 안 팔려서 선물로 줬다. 본새 넣지 마라. 요새는 아무것도 안 팔린다.”
아예 물건을 살피러 밖에 나가보지도 않는다. 언제 적에 들여 놓았는지도 모르는 물건들이 그대로인데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일게다.
그나마 여기처럼 휴게실이라도 있는 곳도 많지 않은데도 에어컨 없다고 시비하는 사람, 딴 데 정신 팔고 있다가 차 놓치고 안 알려줬다고 돈 도로 돌려달라는 사람, 세상에는 참 별난 사람들도 많다. 그렇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런 일에 별로 언성을 높여본 일이 없다. 늘 한결같이 손님들을 대한다. 손님이 만 원짜리 두 장이 딱 붙은 걸 모르고 한 장 인줄 알고 내면 불러서 되돌려 준다. 두 번 세 번 같은 말을 물어도 똑같이 두 번 세 번 자세히 설명해 준다. 남의 자식들도 내 자식 같은 마음으로 대하려고 노력한다. 누구네 집 아들이 오고 가는 지 누구네 손녀가 대학엘 가서 다니러 오는 지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챙기고 인사를 건넨다. 그래서인지 가게 방에 앉아 있는 동안 드문드문 차표를 끊으러 오는 학생들이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부터 한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여기 문 닫으면 우리는 어쩌라고 그러냐고들 하지. 특히 나이 많은 노인네들은 더 하지. 더운 여름에도 그렇지만 추운 겨울에는 특히 더 하지. 우리가 문 닫아 버리면 버스 기다리면서 어디 앉아 쉴 데가 있나, 화장실이 제대로 있나, 그저 시내에서처럼 다들 길가에 서서 버스 기다렸다 타고 그래야지 뭐. 사실 우리 정류장이야 시내에 버스 타는 데하고는 비교가 안 되지. 길안 노인들이 안 그러나? 안동 시내 나가면 버스 기다릴 때 마땅히 앉아 쉴 자리 하나 없고 그늘 하나 없다고. 얼마 전에 이 윗동네 사는 구십 먹은 노인이 안동에서 버스 기다리면서 그랬다고 해. ‘이게 무슨 정류소라, 길안 가 봐라, 길안정류소가 안동보다 백 배 낫다!’고. 비가 오면 어디 들어가 피할 데가 있나, 땡빝에 해 가릴 데가 있나, 여도 이제 우리가 문 닫으면 앞으로 그래 될 테지.”


하루에 들어왔다 나가는 버스가 총 67회나 되는데 이제는 하루에 손님이 백 명도 안 되는 때가 더  많다고 한다. 손님이 백 명이 타도 버스 회사고 터미널이고 수지가 턱도 없이 안 맞는데 그나마 백 명도 못 채울 때가 많으니, 얼핏 보기에도 그저 버티고 있는 게 용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렇지만 말끝마다 이제 그만 둬야지 그만둬야지 하면서도 정작 쉽사리 터미널 문을 닫지 못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다. 손익계산으로 따지자면야 진즉에 그만두었어야 했지만 부부가 평생을 바쳐 지켜온 이곳 터미널을 허물어 버리기가 그리 쉬운 일일까? 아마도 언젠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게 분명한 길안버스정류장, 하지만 그게 머지않은 어느 날이 아니었으면 한다. 사정이 허락한다면 터미널 안쪽 방, ‘이 방이 이래봬도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보일러 틀어놓으면 뜨끈뜨끈하고.’ 라며 할머니가 자랑하시는 그 곳에, 좀 더 오래오래 할머니 할아버지가 앉아 계셨으면 싶다. <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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